동학정신의 '수호자들'
[김삼웅 기자]
유엔산하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23년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의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다고 결정하였다.
전봉준장군 심문기록, 동학군의 편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설치한 집강소 기록 등은 19세기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사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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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오세창 |
| ⓒ 정운현 |
오세창(1864~1953)은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출신이다. <한성순보> 기자를 거쳐 우정국 통신원국장 등을 지냈다. <만세보사>·<대한민보사> 사장을 역임하고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오세창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참의·우정국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1902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 신도가 되었다.
1906년 귀국하여 천도교의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의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혁명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옛날 서화(書畫)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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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이종일 |
| ⓒ 정운현 |
이종일(1858~1925)은 독립운동가, <제국신문> 사장, <천도교회월보> 월보과장, 인쇄소 보성사 사장 등을 지냈다. 3·1혁명 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투옥되었다. 출감 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지내고 한글맞춤법 연구에 공헌했다.
충청남도 태안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이상재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82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 정3품의 위계를 받았다. 1898년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회장, <제국신문> 사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 탄신일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식,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그를 중상하는 측의 고의적인 행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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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양한묵 |
| ⓒ 정운현 |
양한묵(1862~1919)은 한말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여 법도사·직무도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3·1혁명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체포되어 이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1894년(고종 31)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로 능주에서 세무관리로 있다가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베이징 등지를 유람,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그곳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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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권병덕 |
| ⓒ 정운현 |
권병덕(1867~1944)은 천도교 종리원의 서무과 주임,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지냈다.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어났다. 1885년 4월 임규호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1886년 2대 교주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고,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포교활동을 벌여 청주 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의 2차 봉기 때 도인(道人) 3만여 명을 이끌고 참여하였지만,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에게 패퇴하였다. 1906년 1월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의 정비와 교세의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1907년 시천교로 옮겨 활동하다가 교권 장악을 둘러싼 내부 분열이 일어나자, 1916년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이후 장석승례(丈席承禮),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의 역량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권병덕은 1919년 2월 21일 손병희로부터 독립선언 참여 제의를 받고 흔쾌히 찬성하였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배포,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고, 징역 2년형을 선도받았다. 1921년 11월 만기 출옥한 후 천도교 내부에서 개량적 문화운동을 추진하던 구파와 혁신운동을 추진하는 신파의 분쟁이 야기되자, 두 파의 분쟁을 조정하며 천도교 내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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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권동진 |
| ⓒ 정운현 |
권동진(1861~1947)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경남 함안군수와 육군참령을 지냈고, 3·1혁명의 핵심적 지도인물로 일경에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에 참여했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道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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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이종훈 |
| ⓒ 정운현 |
이종훈(1858~1931)은 2대 교조 최시형의 장례를 치른 천도교의 원로이다. 손병희 등과 천도교 개혁에 힘썼다. 3·1혁명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출감 후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25세 때 동학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고, 1898년 천도교 2대 교조 최시형이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자 옥리(獄吏)를 매수, 시신을 몰래 빼내어 장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 손병희·권동진 등과 천도교 개혁에 힘써 도사(道師)가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손병희 사망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만주로 망명,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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