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총리’ ‘선거의 왕’ 수식어… DJ부터 대통령 4명과 각별

한웅희 2026. 1. 2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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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거목’ 이해찬 전 총리 별세
김종인 꺾고 국회 입성… 7선까지
노무현·문재인·이재명 킹메이커
27일 국내 운구… 빈소는 서울대병원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1988년 제13대 총선에 서울 관악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해 유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 출장 중 별세했다. 향년 73세. 노무현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낸 이 수석부의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알려져 있다.

25일 별세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반독재 민주화 투사였다. 1973년부터 유신 체제에 맞서 반세기 넘게 민주 진영을 지켜온 큰 별이 긴 민주화 투쟁의 여정을 마쳤다.

고인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형집행정지로 1년 만에 출소했다. 1980년 6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고인이 내란음모 사건 재판에서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일갈한 일화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수감생활 속에서도 고인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꺾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지도자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낸 후 정치 여정 2막을 시작했다.

그는 총선 무패 기록을 가진 ‘선거 승부사’로 통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신인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송곳 질의를 하며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함께 명성을 얻었다. 노동 분야 입법 활동에도 주력하며 노 의원,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삼총사’로 불렸다.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에서 정무부시장을 맡았고, 1998년 김대중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고,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노무현정부 두 번째 총리로 임명됐다.

2004년 7월 당시 국무총리인 이 수석부의장이 직접 헬기를 타고 신행정수도 후보지인 충남 공주 일대를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는 노 전 대통령과 유일하게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가까운 핵심 측근이자 ‘실세 총리’였다. 총리 시절 행정수도 이전을 주도하고, 이라크 파병 등을 두고 불협화음을 빚던 당정청 관계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대선 문턱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대선 패배 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민주통합당 대표에 올랐으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끝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지역구를 세종시로 옮겨 19·20대까지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014∼2018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좌장 역할을 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됐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해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뒤 문재인정부 때인 2018년 당대표로 선출됐고 2020년 21대 총선의 압승을 이끌었다. 당시 민주당은 위성 비례정당을 포함해 300석 중 180석을 확보했다. 2018년 전당대회 선거운동 때 “개혁정책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며 이른바 20년 집권론을 주창했다.

자신이 ‘마지막 소임’이라고 밝힌 당대표 임기 종료 후에는 여의도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고 동북아평화경제협의회 이사장을 맡았다. 지난해 10월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됐다.

소신과 추진력이 강하지만 독선적이고 깐깐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총리 시절에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야당 의원과 거침없는 설전을 마다하지 않아 ‘버럭 해찬’ ‘호통 총리’로 이름을 날렸다. 가까운 정치인으로는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정태호·김현·이해식·최민희 의원 등이 꼽힌다.

시신은 27일 오전 대한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운구될 예정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옥씨와 딸 현주씨가 있다.

한웅희 기자 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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