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이면 죽는다'? '아이 엠 복서'가 넘지 말아야 했던 '선'
[최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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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예능 프로그램 <아이 엠 복서>의 한 장면 |
| ⓒ tvN |
하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반가움은 의구심으로 변했다. 일부 출연자들이 복싱 고유의 타격과 운영이 아닌, 마치 입식 타격가 같은 기술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반복됐다. 이 프로그램이 진정 복싱의 부활을 꿈꾸는 기획인지, 아니면 복싱의 외피를 쓴 또 하나의 자극적인 격투 예능인지 모호해졌다.
물론 토너먼트 후반부로 갈수록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은 찬사 받아 마땅했다. 실제 타이틀 방어전이라 해도 저 정도의 난타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매 경기 혼신을 다하는 그들에게 경외심마저 들었다. 문제는 그 투혼을 다루는 제작진의 태도였다.
현실 복싱에서는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일
제작진의 연출 의도인지 전문가의 자문 결과인지 알 수 없으나, 프로그램은 현실 복싱에서는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체급을 뛰어넘는 경기'를 성사시켰다. 필자의 눈엔 명백히 '선을 넘은' 결정이었다. 체급은 단순한 체중의 구분이 아니라, 선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기는 강행됐다. 코치와 해설을 맡은 출연자들은 "인생 마지막 경기다", "한 방 맞으면 죽는다"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극적인 연출을 위한 수사였겠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불편함이 컸다. 체급 차를 무시한 난타전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선수들이라고 그 위험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무리한 링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싱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생계와 명예를 얻을 기회가 사라진 현실에서, 이 위험한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동아줄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 절박함을 자극적으로 포장해 시청률로 소비하는 구조가 과연 건강한 스포츠 예능의 방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975년생 인 필자는 고교 시절, 영등포의 88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웠다. 문성길, 김용강 같은 세계 챔피언들이 땀 흘리던 그곳에서 복싱을 배운 것은 단순한 싸움 기술이 아니었다. 예의와 규칙 준수,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복싱의 기본 매너라는 사실이었다.
50세가 넘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줄넘기로 몸을 풀던 어느 날, 장난스럽게 스텝을 밟던 필자에게 당시 챔피언이었던 김용강 선수가 다가와 직접 시범을 보이며 따끔하게 꾸짖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것이 내가 배운 복싱의 엄격함이자 품격이었다.
복싱은 본래 위험한 스포츠다. 그렇기에 더 엄격한 체급제와 안전 규칙이 존재한다. 그 선을 지키는 것이 선수의 생명을 존중하는 길이며, 스포츠가 단순한 '쇼'와 구분되는 기준점이 된다.
우리는 이미 1982년, 김득구 선수를 잃으며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 비극 이후 복싱계는 라운드 수를 줄이고 의료 규정을 강화하며 '재미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교훈을 제도에 새겼다. UFC의 전 챔피언인 코너 맥그리거 같은 스타들이 체급을 올리며 화제를 모으기도 하지만, 그 역시 철저한 의료 관리와 본인의 완벽한 준비라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이 엠 복서>가 보여준, 체급을 넘나드는 경기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다뤄졌어야 했다. 투혼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과, 그 투혼을 위험 위에 세워 소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인생 마지막 경기" "한 방 맞으면 죽는다"는 식의 자극적인 멘트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연출은, 스포츠가 아니라 위험을 서사로 포장하는 순간에 가깝다. 솔직히 말해,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복싱의 부활은 더 센 펀치나 더 위험한 매치업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선수의 안전과 종목의 품격, 그리고 김득구 이후 복싱계가 어렵게 지켜온 약속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시청자의 입장에서, 예능 속 출연자가 아닌 카메라 밖의 제작진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기획하고 있는 다음 경기에, '선수의 생명'보다 소중한 또 다른 가치가 존재하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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