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결혼 후 약물 중독에 빠진 여자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리디아'는 청소년 시절 수영 국가대표를 기대할 유망주였다.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 특기생 입학 기회도 얻었다. 원만하지 않던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대학에 진학하며 해방감에 부푼 것도 잠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그녀는 처음 맛보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한다. 술과 약물에 손을 대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물론 그녀라고 아무 생각 없진 않다. 결혼과 엄마 되기도 꿈꾸지만, 잘되지 않는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감방 신세를 지고 노숙을 전전한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게 하나 있긴 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끄적여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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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연대기> 스틸 |
| ⓒ 판씨네마(주) |
주인공 사연을 듣자면, 제대로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공감을 얻을 요소도 희박하다. 어릴 적 억압당하는 가정환경을 겪었다지만, 워낙 험한 세상이다 보니 그녀의 청소년 시절은 주변에 있을 법한 사연 정도로만 이해할 법하다. 성인이 된 이후 주인공이 겪는 풍파 역시 본인의 우유부단함이 촉발한 '자업자득'에 가깝다. 이쯤 되면 '천하제일 불행대회' 출전한 아마추어 선수 프로필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리디아의 인생 회고는 자신을 포장하며 동정심을 구걸하며 자기연민 하지 않는다. 온라인에 자신 노출하기는 즐기면서도 보여주고픈 것만 선별하는, 이른바 '인스타 감성'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선다.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남김없이 고백하며 이 고통 가득한 통과의례를 자기 정화한다. 그렇게 동병상련을 경험한 이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전한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자체 편집한 보여주기 전용 일기장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록의 태도다. <물의 연대기>는 그렇게 바닥을 경험한 이가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감행한 '필사의 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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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연대기> 스틸 |
| ⓒ 판씨네마(주) |
영화는 그런 원작의 장구한 실패 박람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기려 도전한다. 물론 완벽한 재현은 가능할 턱 없다. 불가능하리란 걸 제작진이 모를 턱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굳이 그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 방법만이 원작과 그에 담긴 작가의 진심을 온전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겨서다.
<물의 연대기>로 첫 장편 데뷔를 치른 '신인' 감독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다. 아마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와 동명이인이구나 싶겠지만, 그 둘은 같은 사람이다. 이 톱스타가 할리우드에서 최고 수입을 내는 여성 배우 타이틀을 내려놓고 독립영화나 중저예산 작품에 출연하며 내공을 축적해 온 여정은 알지만, 이런 돌출은 뜻밖이다.
우리에겐 초인기 시리즈 <트와일라잇> 5부작의 주인공으로 너무나 익숙한, 게다가 명품 브랜드 대명사 '샤넬'의 뮤즈, 세계적인 '셀럽'인 바로 그 배우다. 그는 왜 이렇게 호불호 갈릴 선 굵은작품을 자신의 장편 '입봉'으로 선택한 것일까? 감독 본인이 원작 속 주인공의 이야기에 깊숙이 공감하며 매료돼서다. 이른 나이에 거대한 성공을 맛봤지만,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이 산업이 바라는 이미지에 갇히길 거부하며 자주적이고 세상일에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던 그녀다. 여성의 억압된 성장 과정, 그리고 흔히 사회 '부적응자'들의 감춰진 삶에 공명하며 연대하는 자세를 표명하고자 감행한 결단의 결과물이 <물의 연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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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연대기> 스틸 |
| ⓒ 판씨네마(주) |
마치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듯, 리디아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작가의 회상처럼, '작은 비극들은 순서대로 정리하기 어렵다.' 기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야기'로 옮겨질 때 현상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변환하며 비로소 극복 가능한 상태가 된다. 주인공은 다행히 인생의 막장에서 어디선가 내려온 동아줄을 만날 수 있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원작자로 유명한 작가 '켄 키지'의 작가 워크숍이 리디아에게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
물론 천지개벽처럼 순식간에 밑바닥 패배자가 성공한 작가가 될 순 없다. 스승을 만난 후에도 리디아는 오랜 세월 무명작가, 혹은 지망생에 머문다. 자신의 필력에 좌절하거나 시행착오를 수두룩하게 거친다. 그 세월은 주인공이 가능한 모든 실패를 자초하던 긴 세월과 맞먹을 정도다. 그 기나긴 침잠을 그저 시간 연대기 형식으로만 풀이하면 보는 이가 진이 빠질 지경이다.
감독은 원작의 의외성을 필살기로 활용한다. <물의 연대기>는 전형적 '영웅 신화' 구성, 고귀한 존재가 정해진 시련을 통과의례로 예정된 결말에 도달하는 손쉬운 유혹 대신, 시간 순서를 과감히 부정하며 마치 주인공 머릿속 '의식의 흐름'처럼 순식간에 점프하며 시간을 초월하는 이미지를 선보인다.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훼방, 이를 필사적으로 뿌리치는 사투가 주인공에게 일생을 건 끝나지 않을 싸움으로 계속된다.
부적응자가 세상에 나가기 두려워 숨기만 한다면 스스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너무나 간단하지만, 부적응자에겐 위험천만할 수 있다. 그 간단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부적응자의 신화는 강자의 당연한 승리 서사 대신에 초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승화로 구축된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쳐다보기 싫은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건 개인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재구성을 통해 보편화하는 도전이다. 이를 통해 부적응자는 조금 특별한 집단으로, 다시 평범한 이웃으로 자리를 찾는다. 리디아 유크나비치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로, 다시 관객에게 옮겨갈 작은 희망의 불씨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우리를 만나게 하려는, 즉 물에서 땅으로 발돋움하려는 필사의 도전이다.
<작품정보>
The Chronology of Water
2025 미국, 프랑스, 라트비아 드라마/로맨스/멜로
2026.1. 28. 개봉 128분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출연 이모젠 푸츠, 소라 버치, 톰 스터리지, 짐 벨루시
수입/배급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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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연대기> 포스터 |
| ⓒ 판씨네마(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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