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통증이 바꾼 르누아르의 화풍

최소라 기자 2026. 1. 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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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건강]
말년에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으며 변화한 르누아르의 화풍/사진=Renoir.n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다. 밝고 따뜻한 색채,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으로 사랑받았지만, 말년에는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알려진 질환을 앓으며 극심한 통증을 겪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예술가가 만성 질환과 함께한 기록이기도 하다.

◇류마티스 관절염과 함께한 르누아르의 예술
르누아르는 1862년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과 야외에서 빛을 직접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르누아르는 인상파 특유의 밝고 부드러운 색채로 사람들의 즐겁고 평화로운 일상을 그렸는데, 이는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에 가능했던 섬세한 붓질의 결과였다. 이후 인상주의 기법에 한계를 느끼고 형태의 명확함과 구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잉그르(냉담한) 시기’를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1892년경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추정되는 질환이 시작되며 그의 그림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붓 터치는 단순해지고 형태는 굵어졌다. 1897년 자전거 사고 이후 염증이 급격히 악화되며 점차 손 관절이 변형됐고, 말년에는 손 관절의 심한 변형으로 움직임이 크게 제한된, 일상적인 움직임조차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르누아르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절친한 화가 앙리 마티스가 고통 속에서도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자, 르누아르는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답했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굽어들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에도 구부러진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쥐고, 손에 천을 감아 끝까지 그림을 그려나갔다.

1919년 12월 3일, 생애 마지막 날까지도 그는 막내 아들이 가져다준 아네모네 꽃병을 그리고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제야 그림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으며 일생의 상당 기간을 통증 속에서 보냈다/사진=Classic Chicago Magazine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르누아르가 앓았던 류마티스 관절염은 관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활막에 염증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활막이 존재하는 관절이라면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어, 손·발가락 같은 작은 관절부터 무릎·어깨 등 전신의 움직이는 모든 관절을 침범할 수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인체의 면역체계가 외부 병원체가 아닌 자신의 신체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류마티스 인자(RF), 특정 유전자(HLA-DR), 염증성 사이토카인 등이 차례로 밝혀지며 질병의 실체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연구진을 포함한 여러 연구를 통해 원인 유전자 변이와 염증 조절 기전이 밝혀지는 등 치료법 개발의 가능성도 확대되고 있다.

◇사혈과 부작용을 견뎌야 했던 의학적 암흑기
르누아르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류마티스 관절염의 원인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강동경희대병원 관절류마티스내과 김세희 교수는 “19세기가 돼서야 통풍과는 다른 형태로 여성에 더 자주 발견되는 심한 관절염이 있다는 것이 보고되기 시작했다”며 “1858년 처음으로 알프레드 가로드가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단순히 관절이 닳고 변형되는 질환 정도로 인식됐을 뿐,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의학적 설명은 부족했다. 김세희 교수는 “당시에는 치료를 위해 얼음·온수 목욕 등이 시도됐고, 사혈을 하기도 했다”며 “1929년부터 근육 내 금 주사가 류마티스 관절염약으로 사용됐고, 1950년대에 들어서야 부신피질호르몬(스테로이드)이 도입됐다”고 했다. 하지만 근육 내 금 주사는 피부발진, 구강 궤양, 골수억제, 신증후군 등의 부작용이 심했고, 스테로이드 또한 장기간·고용량 사용 시 고혈당, 고혈압, 골다공증, 쿠싱증후군, 부신기능저하, 백내장, 무혈관성 골괴사 등 다양한 부작용을 동반해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0세기 후반부터 치료 환경이 급격히 진보하며 환자들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김 교수는 “질병을 조절할 수 있는 하이드록시클로로퀸, 메토트렉세이트, 술파살라진, 레플로노마이드가 승인되며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의 근간이 마련됐고, 이에 따라 스테로이드 요구량도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조기 진단과 표적 치료 덕 '관리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현재 류마티스 관절염은 조기 진단과 치료를 통해 관절이 굳기 전 병의 진행을 억제할 수 있는 질환으로 평가된다. 혈액검사·영상검사로 진단도 과거에 비해 한층 간편해지고 빠르게 할 수 있다. 김세희 교수는 “최근에는 가족력이 있거나 건강검진에서 류마티스 인자 양성이 확인될 경우, 관절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전부터 질환을 의심하고 조기에 내원하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을 위한 류마티스 인자, 자가항체, 염증 수치를 기본적으로 확인하고, 엑스레이와 초음파로 빠르게 관절변형과 염증 여부를 빠르게 확인해 볼 수 있다”며 “필요에 따라 CT, MRI까지 시행해 조기에 질환을 발견한다”고 했다.

치료제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김 교수는 “생물학적 제제의 도입으로 류마티스 관절염의 증상 조절이 한층 원활해졌다”고 말했다. 항종양괴사인자제제, T세포 억제제, B세포 제거제, 인터루킨-6 억제제는 물론, 경구용 표적합성항류마티스약제인 JAK억제제까지 승인되면서 환자들의 선택 폭도 크게 넓어졌다. 김 교수는 “덕분에 환자들의 통증 조절뿐 아니라 관절 변형까지 획기적으로 예방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과거에는 통증과 관절 변형을 감내해야 했던 병이 이제는 관리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김세희 교수는 “조기에 류마티스 관절염을 발견하고 적절히 치료한다면 관절 변형과 그로 인한 장애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며 “류마티스 관절염은 무섭고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이 아니라, 잘 관리하면 통증 없이 행복한 일상과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만성 질환으로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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