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곡예사와 상처 입은 예술가, 미친 사랑의 결말
[김상목 기자]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느강 가장 오래된 다리 퐁네프는 노후화로 인한 정비사업으로 출입 통제 상태다. 하지만 갈 곳 없는 몇몇은 여전히 다리 주변에서 몰래 살아간다. 그중 하나인 '알렉스'는 다리에서 노숙하며 밤마다 길거리에서 불꽃 서커스를 공연한다. 어느 날 밤 차도를 비틀거리며 걷던 그는 사고를 당하고 쉼터에 강제 입소한다. 다리로 돌아온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를 낯선 여자가 차지한 걸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미셸'이다. 내쫓으려 흔들어 깨우는 상대를 본 미셸은 그가 자신이 목격한 교통사고 당사자란 걸 알아차린다.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퐁네프 다리 터주대감 '한스'의 반대에도 당분간 머물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처음엔 서먹하던 알렉스와 미셸, 여자는 몸과 마음에 상처로 방랑하고, 남자는 하루하루 넘기던 인생에 훅 들어온 그녀에 끌린다. 둘은 그들만의 열정적 사랑에 빠진다.
|
|
| ▲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 |
작품의 흥행 덕분에 감독의 전작이자 로맨스 3부작으로 묶이게 될,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도 연달아 개봉하며 레오스 카락스란 이름은 당시 한창 소개되던 해외 예술영화 신진 감독 중 우뚝 솟아오른다. 카락스와 더불어 <그랑 블루>, <레옹>의 뤽 베송, <디바>와 <베티 블루 37.2>의 장 자크 베넥스 등 일군의 신예 감독들이 '누벨 이마주'로 묶이며 철학적 예술영화 위주로 소개되던 프랑스 영화에서 이미지와 스타일 중심의, 말 그대로 새로운 영상미를 선사했다.
그중 대중성에 기운 뤽 베송과 반대로 레오스 카락스는 점점 더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도로 이행한다. 그 덕분에 영화가 탄생한 지 한 세대가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퐁네프의 연인들>은 국내에서 가장 친숙한 감독의 작품으로 우뚝 남아 있다. 단발성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되는 인기 덕에 영화는 2014년 재개봉과 더불어 특별상영과 기획전 형태로 종종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첫 공개 당시 필름 상영보다 기술적으로 더 향상된 시청각 조건을 갖춘 4k 복원판으로 두 번째 재개봉을 맞이하려 한다.
1990년대 당시 숱한 미지의 영화가 검열 완화와 문화생활 붐에 힘입어 인기를 구가했지만, 상당수는 그 시절 반짝 열풍으로 그친 채 기억에서 잊힌다. 그 가운데 여전히 꾸준한 상징성을 갖고 호명되는 <퐁네프의 연인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20·30 신예 독립예술영화 관객들에겐 제목은 들었어도 실제 극장에서 체험할 기회는 드물던 영화는 과연 새로운 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제법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
|
| ▲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 |
당대 최고 효능 수면제로 통하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도 1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해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하던 시절이다. 기존 프랑스 영화의 예술성과 할리우드 영화의 재기발랄함이 결합한 스타일 중심에 선 <퐁네프의 연인들>은 마침 새로운 변화에 안성맞춤 작품으로 등극한다. 재개발 중이던 퐁네프 다리를 고스란히 복제한 세트장을 지을 정도로 완벽한 작가적 비전에 몰두한 덕분에, 이 영화의 숱한 명장면은 근사한 그림엽서처럼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 파리라는 도시를 향한 로망의 증폭기로 한몫 단단히 할 만큼.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선뜻 작품 속 주인공들의 로맨스에 말문을 닫게 된다. 감독의 후속작들에서 몇 배로 증폭되는 도발적 실험이 본 작품에도 여지없이 곳곳에 숨은 탓이다. 당대에 유행하던 예술영화 포스터 액자의 단골이 될 만큼 관객의 뇌리에 새겨진 수많은 명장면을 남긴 작품이지만, 스틸 컷으로 보는 정지화면과 막상 이야기 속 맥락으로 감지하는 활동사진은 무척이나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청춘의 질주하는 연애담인 줄 알았는데, 실상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이 그리는 극단적 풍경이 펼쳐지는 탓이다.
알렉스는 내일이 없이 본능과 충동에 몸을 맡기며 지극히 제한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의 과거는 통 알 길 없으나 오랫동안 거리에서 살아온 건 분명하다. 거리의 군중을 상대로 불을 활용한 곡예를 선보일 때만 생기가 넘친다. 일상에서 그는 마치 유럽 관광지에서 혐오대상이 된 집시나 다를 바 없다. 사실상 노숙자 혹은 부랑자에 가깝다.
그런 알렉스에게 미셸이 깃든다. 그녀 역시 노숙 신세라지만, 알렉스(와 그의 동료 한스)는 직관적으로 미셸이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걸 간파한다. 한스는 어떻게든 위험천만한 노숙에서 그녀를 내쫓으려 하지만, 알렉스는 마치 세계의 전부인 양 미셸에게 끌린다. 그녀 또한 마음 붙일 곳 찾으며 자포자기 상태라 알렉스의 호감과 배려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둘은 이내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의지할 데 없는 거리의 곡예사 & 상처 입은 상류층 예술가 조합이라니. 그러나 어느새 둘은 서로 의지하며 한시라도 떨어지면 못 견디는 사이다.
|
|
| ▲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 |
하지만 사랑은 순전한 기쁨만이 아니다. 퐁네프 다리의 대선배 한스는 본능적으로 미셸이 그들과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임을 간파한다. 그는 처음의 퉁명스러움과 달리 세상만사 산전수전 겪은 현인의 지혜와 온정으로 그녀를 배려한다. 예술가인 미셸의 어쩌면 일생 마지막 소원이 될지도 모를 기회를 자신의 과거 경력을 활용해 선물처럼 선사하지만, 젊은 알렉스는 한스와 달리 격렬하고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마치 큐피트 화살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혹여나 연인이 자신을 떠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한다. 미셸을 둘러싼 상황이 급변하며 점점 초조해진다. 그녀가 평생 자신에게 의존하면 좋으련만. 이제 사랑을 집착과 구분하기란 힘들다. 야생동물처럼 알렉스는 날뛰고 울부짖는다. 기분이 좋으면 펄쩍 뛰고 거리를 달리는 퍼포먼스로 감정을 토해낸다.
알렉스 역을 맡은 배우 드리 라방이 어릴 적부터 갈고 닦은 마임과 서커스, 무용 실력이 영화 곳곳에서 눈부시게 분출하며 마치 무성영화 시대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이 보여주던 신체 연기를 재연한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자신의 평생 페르소나로 삼게 된 이유를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견 없이 수용할 만하다. 영화의 기이한 에너지 과반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여기에 현대 프랑스 영화 하면 당연히 떠오를 얼굴, 줄리엣 비노쉬의 알 듯 말 듯한 매혹이 어우러져 화보 사진처럼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 툭하면 터져나온다.
한편 미셸의 사랑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이었을까? 마음의 상처와 점점 나빠지는 건강은 절망의 나락으로 내몬다. 그런 가운데 자신에게 헌신하는 상대를 만난 미셸은 점점 그에게 의지하면서도 항상 여지를 남긴다. 한스가 알아챈 것처럼, 미셸은 나무꾼에게 붙잡힌 선녀의 프랑스 판 같은 존재다. 그녀는 하늘로 승천할 날개옷을 잃은 탓에 마침 자신에게 다가온 미셸을 받아들인 것. 자기만의 날개옷을 찾는다면 어떻게 할지 혼란스럽다.
|
|
| ▲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 |
| ⓒ 엠엔엠인터내셔널㈜ |
그런데도 둘의 우연한 만남부터 안타까운 작별, 질긴 인연을 보고 있자면, 둘이 서로가 속한 계층을 (결정적 순간에 보여줄 파격적 신체 언어를 통해) '다운그레이드'하는 추락의 감행에서 특별한 감흥에 빠져들 테다. 현실의 나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 그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수 있는 극단적 선택, 응원해야 할지 뜯어말려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결정의 난이도 앞에서 관객은 이 기이한 로맨스의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특히나 21세기 도시의 청춘들이 오랜만에 귀환한 <퐁네프의 연인들>을 어떻게 맞이할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이 연인의 특별한 사랑을 20세기와 21세기의 관객이 다르게 감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작품정보>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1991 프랑스 로맨스, 드라마
2026.1. 28. 개봉 125분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각본 레오스 카락스
출연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클라우스 미하엘 그뤼버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세계 매출 1위'로 등극한 약, 왜 한국에서만 유독 비쌀까
- 7억+ 7억, 농협 수장의 '돈잔치'...법 개정 없으면 '공염불'
- [단독] 해킹도 아닌데, 주민번호 등 개인정보 노출한 서울시설공단
- 이과 남자가 만든 것 같지 않은, 한파 대비 블루베리 하우스
- '현대판 면죄부' 탄소 상쇄를 성찰한다
- "부부싸움 하다 차 문을 열고..." 우리가 잘 몰랐던, 대리기사의 속사정
- 한국인 알바생이 '두쫀쿠' 만들자... 런던 카페 사장의 반응
- 행정통합 우려...강민정 "특권 특목고 남발"-이병도 "교육종속"
- "여기다 집중 투자를..." 울산 찾은 이 대통령이 콕 집어 강조한 산업
- 민주당에서도 "이혜훈, 혼인한 장남 이용 청약은 명백한 불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