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기부의 윤리학

권기석 2026. 1. 2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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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인 존 폴슨은 2015년 미국 하버드대에 4억 달러(약 5900억원)를 기부했다.

노조는 서울대와 홍 대표의 협약식이 개최된 날 기자회견을 열고 "1000억원의 기부는 죄를 씻기 위한 속죄금이 돼야지 위선의 가면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23년 영국 옥스퍼드대는 1993년 이후 수백억원을 기부한 미국의 유명 부호 새클러 가문과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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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석 사회부장


미국의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인 존 폴슨은 2015년 미국 하버드대에 4억 달러(약 5900억원)를 기부했다. 당시 기준으로 대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기부금이 간 곳은 하버드 공학응용과학대학. 대학 측은 감사의 뜻으로 해당 단과대의 이름을 ‘하버드 존 폴슨 공학응용과학대학’으로 바꿨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곧 논란이 불거졌다. 세계적 석학인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경제학부 교수가 폴슨의 과거 투자 행태를 거론하며 하버드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삭스 교수는 폴슨이 2007년 골드만삭스와 손잡고 서브프라임모기지 금융 상품을 설계하고, 상품이 망하는 쪽에 투자해 10억 달러를 벌었으며 역으로 이 상품이 수익을 내는 쪽에 걸었던 투자자 일부는 큰 손실을 보고 파산했다고 지적했다. 삭스 교수는 “골드만삭스는 비윤리적 행태로 벌금 5억5000만 달러를 물었지만 폴슨은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면서 “하버드대가 폴슨 공대로 명칭을 바꾼 일은 비윤리적”이라고 말했다.

기부가 익숙한 서구에서 비윤리적 기부자의 돈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조성된 기부금은 오염됐으므로(tainted) 받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과 ‘좋은 돈’과 ‘나쁜 돈’은 구분이 불가능하며 나쁜 돈이라도 좋은 일에 쓰면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 맞선다.

‘오염된 기부’ 개념이 낯선 국내에서도 기부자의 윤리성이 쟁점으로 부상할 조짐이다. 서울대는 지난주 좋은책신사고 홍범준 대표가 필즈상 및 노벨상 인재 양성을 위해 1000억원을 쾌척했다고 밝혔다. 단일 기부로 서울대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이다. 서울대와 좋은책신사고는 1000억원으로 ‘발칙한 자연과학적 상상과 수리 논증을 위한 무주·쎈 연구기금’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무주’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홍 대표의 철학이 들어간 말이고, ‘쎈’은 학습서 출판사인 좋은책신사고의 대표 브랜드다. 그런데 홍 대표의 회사 좋은책신사고는 부당노동행위 논란으로 수년째 시끄러운 곳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10건 이상 인정됐고, 고용노동부 서울남부지청은 지난 5월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홍 대표를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노조는 서울대와 홍 대표의 협약식이 개최된 날 기자회견을 열고 “1000억원의 기부는 죄를 씻기 위한 속죄금이 돼야지 위선의 가면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가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짓고 있는 두 번째 시립 도서관인 ‘김병주 도서관’도 기부자의 윤리에 관한 시험대가 됐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은 도서관 건립 비용의 절반에 가까운 300억원을 기부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붙여 달라고 요구했고 서울시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 회장은 ‘홈플러스 사태’를 둘러싸고 1000억원대 사기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서울시는 홈플러스 사태가 불거지기 전의 약속이고 이미 기부금도 모두 받은 터라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 반면 좋은책신사고의 부당노동행위 논란은 수년 전부터 계속된 것이어서 서울대가 기부 약정을 받기 전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서울대는 홍 대표 기부의 공익적 효과에 무게를 두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기부는 장기적으로 평판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2023년 영국 옥스퍼드대는 1993년 이후 수백억원을 기부한 미국의 유명 부호 새클러 가문과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했다. 새클러 가문은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의 제조사 퍼듀파마의 오너가다. 이 회사가 옥시콘틴의 광범위한 사용을 부추겨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비판 여론을 옥스퍼드대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권기석 사회부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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