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자본의 국적, 기업가의 국적

지난해 한국으로 온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360억5000만 달러였다. 신고 기준으로 역대 최대 실적이라고 산업통상부가 연초에 발표했다. 국내로 들어온 돈이 있으면 나간 돈도 있을 터다. 국내에서 해외로 나간 FDI가 재정경제부가 발표하는 해외 직접투자다. 이 통계를 보니 지난해 1~3분기 누적으로 473억6000만 달러였다. 지난해 연간으로 따지면 얼추 전년 수준(2024년 639억5000만 달러)은 될 듯싶다. 한국 기업의 반도체·배터리 등 대(對)미국 첨단산업 투자와 국민연금의 해외 부동산 등 대체자산 투자가 이어진 영향이다. 최근 몇 년 통계를 보니 해외 직접투자가 외국인 직접투자의 두 배를 넘어선 해가 많았다. 한국에 들어온 것보다 해외로 나가는 FDI가 더 많아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영이 활발해지면서 2000년대 초중반 이후 추세적으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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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힘 세진 ‘함포 자본주의’ 시대
쿠팡 이후 기업가 국적 다시 생각
한국 기업은 한국 정부가 챙겨야
」
문제는 스스로 ‘관세 킹’을 자처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식 압박으로 ‘부자연스러운’ 투자가 생길 우려다.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가 과도하면 국내 생산 기반이 약해지고 일자리가 쪼그라든다. 관세 협상 타결을 위해 약속한 매년 2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도 버거운데 반도체 관세를 무기로 국내 기업의 미국 투자를 늘리라는 압박까지 더해질까 걱정이다. 이미 한국 기업은 미국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제조)와 패키징 공장이 있거나 건설 중인데 메모리 반도체 공장은 없다. 메모리 핵심 공정은 수천 개 소재와 부품이 필요하다. 협력사가 모여 클러스터를 형성해야 한다. 메모리 반도체 핵심 공정을 국내에 두는 이유다. 그런데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메모리 투자를 꼭 집어 언급한 것을 보면 메모리 현지 생산을 대놓고 압박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절대 안 될 일이다.

마침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함포 자본주의(gunboat capitalism)의 귀환’을 최근호 커버스토리로 게재했다. 18세기 서양인들이 대포를 장착한 군함을 앞세워 강압 외교를 했던 것처럼, 국가가 다국적기업의 팔을 마구 비트는 시대로 돌아갔다는 거다. 그 결과 다국적기업 이익은 줄고 효율성은 떨어졌다. 관세, 보조금, 수출 통제로 중국과 러시아에서 빠져나온 다국적기업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2016년 미국 다국적기업의 미국 내 자본지출은 44%였지만 지금은 69%다.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글로벌 경영은 지정학과 공급망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주주 이익은 줄고 소비자는 더 비싼 가격을 부담하는 세상이 됐다. 트럼프는 석유와 천연자원에만 혈안이지만 정작 중요한 혁신과 무형자본에는 무심하다. 시장주의를 옹호하는 이 잡지는 함포 자본주의의 미래에 비관적이다. “정부는 지대(地代)를 만들고, 지대는 시장을 왜곡하며, 왜곡된 시장은 국가를 가난하게, 국민을 뒷걸음치게 만든다.”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초국가자본이 정부를 쥐락펴락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 잠시 회자했다. 하지만 요즘 트럼프 시대의 다국적기업은 그야말로 고양이 앞에 쥐 신세다. 조폭이 힘쓰는 뒷골목 세상처럼 오로지 힘이 정의인 현실주의 국제정치 시대에 도덕과 염치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그놈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배우며 외국 자본에 대한 기울어진 시선을 교정해야 했다. 자본의 국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외국 자본이든, 토종 자본이든 국내에서 사업하고 일자리 만들면 그게 좋은 것이라는 반성이었다. 뭐든 무턱대고 토종이 좋다는 편견을 줄이는 건 의미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쿠팡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이 다시 복잡해졌다. 때로는 감내하기 불편하고 인내를 시험하는 듯한 외국 자본도 있었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지만 기업인에겐 분명히 국적이 있었구나 곱씹게 됐다. 그래도 한국 기업을 살뜰히 챙길 곳은 한국 정부밖에 없다. 바깥에서도 힘든데 안에서까지 우리 기업 힘들게 하지는 말자. 트럼프 정부 2기는 오늘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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