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의 시선] 트럼프 1년, 규범의 퇴장과 거래의 시대

박소영 2026. 1. 20.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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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 취임 1년을 맞았다. 지난 1년은 ‘미국 우선주의’가 구호를 넘어 세계 질서를 재편한 시간이었다. 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규칙과 제도, 동맹은 빠르게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거래와 압박, 강압의 논리가 대체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조정자도, 규범의 수호자도 아니었다.

「 관세와 무력으로 쓴 세계지도
그린란드까지 번진 힘의 논리
‘동맹의 시대’ 이후 대비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2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상호 관세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먼저 꺼내 든 수단은 관세였다. 중국뿐 아니라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 한국과 일본까지 예외는 없었다. 철강·자동차·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대한 고율 관세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그는 “미국에 투자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그리고 각국 협상국 대표단을 향해 인상한 대미 투자금액을 제시하며 백악관 집무실을 거래의 장으로 바꿔놨다.

트럼프는 자신을 ‘피스메이커’로 규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분쟁을 비롯해 세계 곳곳의 전쟁을 “즉각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해법은 중재가 아닌 힘의 재배치였다. 우크라이나에는 휴전 압박을, 이스라엘에는 사실상의 백지수표를 건넸다. 전쟁을 멈추겠다는 언어 뒤에는 언제나 미국의 부담을 줄이고 영향력을 극대화하겠다는 계산이 깔렸다.

그 정점이 베네수엘라 사태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군사행동을 통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체포해 미국 법정에 세웠다. “마두로가 미국으로 유입되는 대규모 마약 유통과 연계됐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주권 침해이자 힘의 과시로 받아들였다. 국제법의 틀을 벗어난 이 사건은 불복종 국가에 대한 직접 처벌이라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그의 발언 속에 압축돼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국제법은 필요 없다. 내 도덕성만이 날 멈출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은 개인의 판단이 국제 규범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그는 집권 1기 때부터 “다른 나라도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라”며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해왔다. 이는 러시아와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군사 대국들에 지정학적 공간을 열어주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

그 파열음은 이제 북극해의 얼음층마저 깨뜨리고 있다. 그린란드 병합논란을 계기로 촉발된 덴마크 주도의 ‘북극 인내작전’은 그 상징적 단면이다.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 주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이 미군 없이 결집한 이번 훈련은 더 이상 미국의 우산 아래 안주하지 않겠다는 유럽의 ‘안보 독립 선언’으로도 읽힌다. 미국은 즉각 추가 관세라는 경제적 몽둥이를 들었으나, 유럽 역시 맞불 관세로 응수하며 한때의 혈맹은 이제 거친 전장(戰場)의 대척점에 섰다.

과거 화웨이 사태로 대중(對中) 전선의 최전방에 섰던 캐나다가 지난주 중국과 ‘새 전략적 파트너십’을 선언한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는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초래한 동맹의 공동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는 한국에 더욱 복잡한 선택을 요구한다. 한·미 동맹은 여전히 안보의 핵심축이지만, 그것만으로 국익이 자동 보장된다는 인식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은 가치와 이해를 공유하는 중견국들과의 연대를 실질화해야 한다. 일본, 호주, 유럽연합과의 협력은 선언적 수준을 넘어 공급망 안정, 방산 협력, 기술 규범 설정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동시에 미·중 경쟁의 틈새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외교적 공간도 넓혀야 한다. 인도,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는 더는 주변부가 아니라 경제와 외교의 새로운 축이다.

경제·안보·외교의 선택지를 다변화하는 일도 시급하다. 특정 국가나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곧 전략적 취약성으로 이어진다. 에너지와 식량, 핵심 광물과 첨단 기술에서 자립과 협력의 균형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방위력 역시 동맹 의존을 넘어, 동맹을 지렛대로 한 자강의 방향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올해는 미국 독립선언 250주년이다.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저항해 탄생한 나라가 이제는 관세와 압박으로 세계를 움직이려 하고 있다. 미국이 스스로 구축한 자유무역과 규범의 질서를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미국 하원의원들이 지난해 7월 3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의사당 하원 본회의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감세 법안에 대해 표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제 시선은 11월 미국 중간선거로 향한다. 미국 사회가 제도적 견제와 자정 능력을 회복할지, 아니면 트럼프식 세계관을 더 공고히 할지 분수령이 될 것이다. 트럼프의 첫 1년은 분명히 보여줬다. 세계는 더 이상 미국이 설계한 질서 위에만 서 있지 않다. 그 변화에 대비하지 않는 국가는, 다음 거래의 대상이 될 뿐이다.

박소영 논설위원 park.s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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