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스타트업, 과실은 대기업이?…‘규제 샌드박스의 역설’ 논란
정부가 혁신 성장을 위해 도입한 ‘규제 샌드박스’가 스타트업의 ‘무덤’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맨땅에서 시장을 일궈낸 혁신 기업들이 정작 제도화 단계에서는 거대 자본과 공공기관에 밀려 쫓겨나는 ‘샌드박스의 역설’이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 예비인가 무슨 일?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인가 ‘옥신각신’
최근 스타트업 업계가 금융당국 예비인가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1월 중순 열린 정례회의에서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안건 상정을 보류했다. 당초 유력 사업자로 거론되던 한국거래소(KRX)·넥스트레이드(NXT) 컨소시엄 선정에 대해 공정성 시비가 불거지자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혁신의 리스크를 감내한 주체는 쫓겨나고, 안정성을 앞세운 거대 기관이 무임승차한다는 비판에 있다. 루센트블록은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후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통해 누적 거래액 300억원, 회원 수 50만명을 달성하며 불모지였던 시장을 증명해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자본시장법상 ‘발행·유통 분리’ 원칙을 내세워 유통 시장 운영권을 자본력을 갖춘 대형 기관에 넘겨주려는 기류다. 루센트블록 측은 발행업을 포기하고 유통업으로 전환하겠다는 승부수까지 던졌으나, 8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데이터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경쟁자인 넥스트레이드가 루센트블록과 비밀유지계약(NDA)을 맺고 노하우를 파악한 뒤 독자 진출을 선언했다는 ‘기술 탈취’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도덕적 해이 논란도 점화됐다.
업계 관계자는 “혁신의 리스크를 감내한 스타트업은 토사구팽당하고, 안정성을 앞세운 대형 기관이 무임승차하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며 “이대로라면 루센트블록은 존폐 기로에 서게 된다”고 성토했다.

6년 만에 제도 한계 드러내
규제 샌드박스는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래 놀이터처럼, 신기술·신산업을 시도하는 기업에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면제해주는 제도다.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는 2019년 1월 정보통신융합(ICT)·산업융합 분야를 시작으로 4월 금융 분야까지 확대 도입됐다. 당시 정부는 “규제 혁신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겠다”며 이 제도를 혁신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꼽았다.
도입 초기에는 성과도 있었다. 수많은 스타트업이 규제 특례를 통해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출시했다. 하지만 제도가 시행된 지 6년이 지난 현재, ‘임시 허가’ 기간이 끝나고 정식 제도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결함이 노출되고 있다. ▲입법 지연 ▲부처 간 칸막이 규제 ▲기득권과의 갈등 조정 실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혁신 기업들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입법 지연에 쓰러진 ‘차지인’
루센트블록 외에도 규제 샌드박스의 구조적 모순으로 좌초된 사례는 부지기수다. 블록체인 핀테크 기업 ‘다윈KS’는 비대면 외화 환전 기술(DTM)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샌드박스 승인을 받았으나, 금융당국의 벽에 막혔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자금 세탁 우려를 이유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종명 다윈KS 대표는 “정부 부처끼리 말이 달라 사업이 중단됐고, 졸지에 불법 업체 낙인이 찍혔다”며 한국을 떠나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샌드박스 1호’ 기업인 전기차 충전 스타트업 ‘차지인’의 사례는 입법 지연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금형 콘센트 기술로 주목받았지만, 정식 법제화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 시장의 트렌드가 급속 충전으로 넘어가며 골든타임을 놓쳤다. 결국 투자 유치에 난항을 겪던 차지인은 자금난 끝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아야 했다.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임시 허가’는 시한부 생명 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졸업생 위한 ‘착륙 장치’ 필요
우선권 보장 등 제도 보완 시급
물론 이번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안건을 루센트블록 입장에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에 참여 중인 1위 사업자 뮤직카우가 “루센트블록의 주장이 시장 전체를 고사시킬 수 있다”며 정면 반박하고 나서면서다.
뮤직카우 측은 루센트블록이 제기한 넥스트레이드의 노하우 도용 의혹에 대해 “넥스트레이드 사업 계획에는 국내 조각투자 거래의 98%, 누적 거래액 4000억원을 달성한 뮤직카우의 압도적 시장 노하우가 반영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에는 뮤직카우뿐 아니라 세종디엑스, 스탁키퍼, 투게더아트 등 다수의 혁신 기업이 사활을 걸고 참여 중인 반면, 루센트블록 컨소시엄에는 루센트블록 한 곳만 참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루센트블록만이 유일한 혁신 기업인 것처럼 비치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했다.
국내 핀테크 업계를 대변하는 한국핀테크산업협회(이하 핀산협) 역시 최근 긴급 성명을 내고 금융당국을 향해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인가를 조속히 결정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550여개 핀테크 기업을 회원사로 둔 핀산협은 “조각투자 유통 시장 인가는 대한민국 미래 디지털 금융 생태계 발전의 출발점”이라며 “최근 일각의 논란으로 시장 개설이 지연돼 차세대 금융으로의 전환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칠 위기에 처했다”고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들은 규제 샌드박스 제도 자체를 이참에 보다 투명한 원칙 아래 업그레이드해야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시장성을 검증한 선도 기업이 정식 제도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준다든지 실증 특례 이후의 ‘출구 전략(Exit Strategy)’을 전면 재수술하는 식이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대표는 “시장을 개척한 스타트업의 기여도를 인정해 사업권 선정 시 가점을 주거나, 일정 기간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등 실질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중기특별위원장)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을 견인한 스타트업이 배제된다면 정부의 혁신 정책에 대한 신뢰가 붕괴될 것”이라며 “샌드박스 졸업 기업이 안정적으로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랜딩 기어(착륙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금융위의 차후 결정이 향후 제2, 제3의 벤처 혁신을 가늠할 중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4호 (2026.01.21~01.27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c) 매경AX.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최소 10억은 넘을 줄 알았는데”...집주인 ‘비명’ [김경민의 부동산NOW]- 매경ECONOMY
- 코스피 투자 종목 고민하시나요...펀드매니저 647人이 뽑은 상반기 포트폴리오 [스페셜리포트]-
- “사두면 오르던 시대 끝” 부동산 판 흔드는 ‘용도변경’- 매경ECONOMY
- ‘가장 친한 친구’ 네이버의 배신 [편집장 레터]- 매경ECONOMY
- 타격음 주목…‘탁’ 가벼운 소리 나면 굿샷 [톱골퍼 비밀노트]- 매경ECONOMY
- “모처럼 반등할 줄 알았는데”…비트코인 9만2000달러선 ‘휘청’- 매경ECONOMY
- “미친 듯 오르더니 초고속 추락”…천일·동양고속 하루 만에 ‘개미 지옥’- 매경ECONOMY
- [속보] 스페인 고속열차 충돌 사고로 최소 21명 사망·100명 부상- 매경ECONOMY
- 편의점 빅3 ‘무노조 경영’이 36년 만에 깨진 이유 [취재수첩]- 매경ECONOMY
- 인버스에 베팅하는 개미들...“더 오를 이유가 없다”- 매경ECON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