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공무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인민군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박만순 2026. 1. 1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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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 1945~1960 25화] 청주 인민공화국 시대, 마을마다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던 그때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쾅쾅쾅' 하는 흐릿한 소리에 당시 충북 청주 내덕동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난리가 났다더니 인민군이 근방까지 왔나부네."
"잣고개에서 인민군이랑 국군이 한바탕 붙었댜."

내덕동 주민들이 인민군이 쏘는 대포 소리에 가슴이 펄떡였던 때는 1950년 7월 9일이었다.

진천 잣고개 전투와 국군의 후퇴

진천 잣고개 전투에서 인민군에게 패배한 국군은 후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제1군단장 김홍일은 7월 10일에 "제1사단은 적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괴산~미원으로 철수하고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국군 수도사단(준장 김석원)과 제2사단(대령 이한림)은 1950년 7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인민군 제2사단과 청주 북방 팔결교, 오근장과 청주시가지,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국사봉 및 피반령 일대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이 청주를 포기하고 후퇴한 것은 7월 13일이었다. 후퇴 직전 긴급 야전회의가 열렸다.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적의 우세한 화력과 기갑력에 대항하려면 시가전 밖에 없다. 다소 병력의 손실을 보더라도 시가전을 전개하여 적을 청주시에서 저지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20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지금은 미원리~피반령~마동리~문의 선의 능선에서 방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의견을 냈다. 김홍일 군단장은 박기병 대령의 손을 들어 주었다(충청북도통합방위협의회·제37보병사단, <충북지역전사>, 2000).

군인과 관공서 직원들이 청주를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은 7월 13일 오전이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인민군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인공(인민공화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떠나면 최후길이다
언제 다시 오려나
정든 동무들도 남모르게 눈물을
이 몸은 일선으로 친일파와 투쟁의,
때려라 부시어라 3.8도 경계선."
- '인민군대 리별가' 가사 중에서.

인민군들이 청주로 입성하면서 부른 <인민군대 리별가>이다.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청주 시민들은 자라목이 되어 인민군대의 행진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몇몇 사람들은 '드디어 인민의 세상이 왔다'며 환호작약 했다.

학교마다 구성된 전쟁피해 조사위원회

인민군이 진주한 후 청주 시내 각급 학교에 전쟁피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석교인민학교(석교초)의 전쟁피해 조사위원회는 책임자에 검열원 장한욱이, 위원에 자치위원장 김재환, 민청(북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 김완재, 여맹(여성동맹)위원 정동혜, 무희숙이 선정됐다.

교동인민학교(교동초)에도 지도검열원, 직장 책임자, 총무, 민청위원장, 민청원이 위원으로 임명(혹은 선출)되었다. 청사부속인민학교(청주사범부속초) 책임자로는 자치위원장 허택이, 위원으로는 직맹(직업동맹) 책임자 한영수와 민청 책임자 김상태가 임명되었다. 덕성인민학교(덕성초)에는 자치위원장, 민청위원장, 직맹위원장이 전쟁피해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중학교에도 전쟁피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세광중학교에는 위원장으로 이현우 학교지도관리원이, 위원으로는 학생대표 오우근과 학교자치위원회 준비위원 김오경이 임명되었다.

청주여자중학교와 청주공업중학교, 청주중학교, 청주여자상업학교, 청주사범학교, 청원중학교, 청주상업학교에도 구성되었다. 청주공업중학교에는 자치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 민청위원장, 직맹위원장, 경리책임자가 임명되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청주 시내 각 초·중등학교에 전쟁피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위원으로는 검열원, 자치위원장, 민청위원장, 여맹원, 학생대표, 직맹위원장, 총무(경리책임자), 교장 등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전쟁피해 조사위원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조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인공시절에 미군 폭격에 의한 학교 피해를 조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초등학교(인민학교) 제1학년 아동수와 적령아동수 조사표를 작성했다. 1학년 학생들의 나이를 6세부터 12세까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사표를 작성했다. 요즘 같으면 모든 학생이 6~7세에 입학하지만 당시에는 졸업반 나이의 12세 아동이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체국과 주조공장에도 각급 기구가 구성되었다. 우체국에는 우체국장과 통계, 직맹장, 민청장, 당책(黨責)이 임명되었다. 지역 단위에만 인민위원회와 별도의 당 조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직장 차원에도 당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청주주조(酒造)공장 관리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서기장, 기술자, 노역자(노동자) 등 총 13명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에서 있었던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청주시 관공서 서류, 1950).

인민위원회와 직능 단체의 탄생
▲ 청주인민위원회 조직도 청주인민위원회 조직도
ⓒ 박만순
인민군이 입성하자 환호작약하는 사람도 있었고, 국가로부터 배척을 받은 사람들은 우호적 입장을 가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분노를 가슴에 안은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위 두 부류의 사람들을 기본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인민위원회는 행정조직으로 평시에나 전시에 모두 있어야만 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보도연맹원은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인공시기 다양한 조직에서 중책을 맡지는 못했다. 한 번 변절한 사람(국민보도연맹원)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즉 생존 보도연맹원들이 인공시절 노동당원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또한 인민위원장이 좌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특히 면과 마을 단위에서는 더욱 그렇다. 면인민위원장(면장)과 리인민위원장(이장)은 전쟁 전 좌익경력보다는 면과 마을에서 지역민들에게 두루두루 존경받는 인물이 맡은 경우가 많았다. 무색무취한 인물이 마을과 면의 수장이 되는 것이 전쟁피해가 적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주민들의 선택에 가장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맡은 인민위원장들은 주민들에게 인심을 잃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청주시 인민위원장에는 1대에 청원군 옥산면 출신이자 청주중학을 나온 임상순이, 2대 위원장에는 김상주가 맡았다. 김상주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충북지부 부위원장을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위 김상주가 경남 진주 출신으로 남로당 진주시위원장을 맡은 후 청주로 이전해 영운동에서 풍로공장을 운영한 김상수(金相洙)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청주시 인민위원회 내에는 문화선전과, 로동과, 양정과, 서무과, 상공과, 농림과, 사회생활과, 도시경영과, 교육과, 재정과, 보급과, 보건과가 구성되었다.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서였다. 사실 누가 권력을 잡든 반드시 필요한 행정조직이었다.

직능단체로는 민청, 여성동맹, 국유건물관리소, 농민동맹, 직업동맹이 있었다. 또한 각 동별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사직동, 수동, 서운동, 모충동, 우암동, 남문로, 북문로 등 모든 동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인민위원장(동장)이 임명되었다.

인민위원회와는 독립적인 기구도 구성되었다. 정치보위부(검찰청), 내무서(경찰서), 인민재판위원회(법원), 교화소(형무소), 노동당이 만들어졌다. 특히 노동당은 인민위원회보다 상급조직의 성격을 갖는다. 청주시당 위원장은 신정식이 맡았다. 신장식은 청원군 강서면 원평리 출신의 좌익 활동가로 전쟁 전 빨치산 활동을 했다.

청원군 인민위원장은 사주면 봉명리(현 청주시 봉명동) 출신으로 청주농업학교를 나온 남정진이 맡았다. 강내면은 김용각·왕익수가, 옥산면은 곽면영·유영준이, 강외면은 장천만이, 오창면은 오형근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0>, 1973).

세대 조사와 시민 통제
 청주시인민위원회 재무과애서 실시한 세대조사표
ⓒ National Archives and Rec
청주시 인민위원회 재무과는 세대조사에 착수했다. 각 세대의 구성원과 직업, 수입 내역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각 세대에 부과하는 세금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재무과에서 조사한 이봉준 세대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세대주: 이봉준(남), 가족 수: 4명
세대주 직업: 자유노동
자택 구분: 자가(自家)
세대주 월평균 수입사항: 1만 원
동거 가족 수입 사항: 무
지방자치세 등급: 5등급
기세액: 700원"

청주시 인민위원회는 시민들에게 공평한 과세를 위해 위와 같이 세대별 재산 내역을 상세히 조사했다. 세대 구성원 숫자뿐만 아니라 집 소유 형태, 동거 가족 수입 유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필자가 확보한 인공(인민공화국) 시절 청주시 인민위원회에서 생산한 <세대 조사표>에 의하면 재산의 등급을 총 6등급으로 구분했다. 등급이 같다 하더라도 과세액은 천차만별이다. 세대주와 동거인의 수입에 따라 과세액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와중에 이렇게 세밀하게 세대조사를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세대조사는 청주시인민위원회 재무과가 주관하지만 실제 조사는 각 동별 인민위원회에서 집행했다.

재무과에서는 세대조사를 하는데 주택과 수입 내역만 조사한 것이 아니다. 자전거와 마필 소유 여부도 조사했다. 1950년 9월 23일 현재 수동 1구 인민위원장 조두식이 청주시 인민위원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수동 1구에는 자전거 소유자가 4명이었다. 그런데 자전거가 모두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유는 '다이야 절단' 때문이었다. 즉 타이어가 펑크 난 것이었다.

마필조사에서는 소가 주요 조사대상이었다. 운천동 445번지 강기화는 4세 된 암소를 한 마리 소유했는데, 가격은 12만 원가량이었다. 이런 세대조사를 근거로 재무과에서는 청주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동산을 압류하거나 구매하였다. 압류는 청주내무서(현재의 경찰서)에서 집행했다. 즉 세대조사는 동인민위위원회에서, 세금 부과 및 압류 혹은 동원 계획은 재무과에서, 집행은 내무서에서 했던 것이다.

야간 통행 제한과 행정 지휘 체계
 야간통행증명서. 청주내무서장 앞으로 보낸 야간통행증명서 신청서
ⓒ National Archives and Rec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 신장식이 청주시인민위원장 앞으로 보낸 청구서
ⓒ National Archives and Rec
인공시절 시민들은 야간에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청주내무서는 공적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만 '야간통행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청주내무서는 남문로 1가 2구 인민위원장 최창성이 신청한 '야간통행 증명교부 신청서'를 발급했다.

충청북도와 청주시 각급 조직이 청주시 인민위원회에 협조 요청한 내용도 확인된다.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 신정식이 청주시 인민위원장 앞으로 보낸 공문에 "청주시당 사업비로 사용하고자 하니 석유 10도라무(드럼)를 승인하여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있다.

조선직업동맹 충청북도 평의회 위원장 송판석이 청주시 인민위원장에게 보낸 공문에는 "등사기 3대를 유춘길의 책임 아래 등록했음"이라는 내용이 있다. 충청북도 인민위원장 리민용은 청주시인민위원장에게 철원 출신의 리영희를 청주시 국유건물관리소 소장으로 파견하면서 소개장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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