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주의 혁신의 길] 한국 과학기술 7만 개 ‘화살’, 과녁은 어디인가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의 5%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R&D 투자국이다. 올해는 정부 R&D 예산만 35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투자 규모가 늘수록 국민적 기대와 질문도 커지게 된다. 매년 7만개가 넘는 연구과제가 수행되는데 국민이 체감할 만한 혁신은 충분했을까. 논문과 특허는 늘어남에도, 에너지 불안과 산업 경쟁력 약화, 국민 건강 위험과 안전 사고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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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로 신산업 창출 미국
국가 차원서 속도전 내는 중국
한국, 아직 파편화한 기술 추격
‘K임무’ 아래, 전략 재설계해야
」
![2025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 참여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스에 지구 모형이 놓여져 있다. [연합뉴스]](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19/joongang/20260119002327320ulpj.jpg)
미국 ‘창세기 임무’, 중국 과학기술 굴기
문제는 성과의 양이 아니라 구조다. 한국의 R&D는 오랫동안 정부와 기관별로 나뉜 단위과제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안건에 따르면, 2024년 기준으로 30여개 정부 조직과 70여개 전문기관이 각각 과제를 선정·관리했다. 개별 과제는 대부분 성실히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수많은 성과가 모여 어떤 국가적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화살은 많았지만, 방향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과학기술의 방향을 명확히 했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창세기 임무(Genesis Mission)’를 발표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해 향후 10년 내 과학기술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목표는 에너지 자립, 과학적 발견 가속, 국가 안보 강화다. 핵융합과 차세대 원자력, 전력망, 신약 개발 등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정하고, 기업·연구소·학계를 하나의 팀으로 묶는 전형적인 임무 지향 혁신 모델이다. 창세기 임무는 미국의 중대한 승부수다. 과학 강국인 미국이 인공지능을 활용한 과학기술의 ‘속도전’을 내세운 이유는 산업의 새판짜기 전략과 관련된다. 제조 기반이 부족한 미국에서 현 수준의 산업 건설은 타국 대비 경쟁력을 만들지 못한다. 완전히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견에 기반한 신산업 건설, 그것이 창세기 임무에 함축된 미국판 초격차 전략이다. 중국의 행보는 더욱 급진적이다. 장기간 일관되게 추진해 온 과학기술 굴기는 대규모 AI 모델·반도체·배터리·바이오·우주와 양자 기술로 확장되며, 산업 고도화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AI·에너지·양자 등 주요 분야를 국가 차원의 신형 거국체계로 묶어 기술의 속도전을 전개하고 있다. 미·중 경쟁은 개별 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방식의 경쟁이 됐다.
과학기술이 살펴야 할 국가 생산력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무엇일까. 과거처럼 기술 추격이나 기업별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 차원의 ‘K임무’를 설정하고, 과학기술의 방향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우선 한국은 산업의 지속가능성과 초격차 전략에 맞춰 과학기술 임무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미국이 과학기술을 신산업 창출 임무로 활용하고, 중국이 현대화된 산업 체계라는 큰 그림 속에서 기술을 진흥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부품이나 장비 단위의 국산화처럼 파편화된 기술 추격에 머문다. 향후 과학기술 임무는 공급망 안보와 제조 경쟁력, 글로벌 산업 표준 주도권을 아우르는 ‘국가 생산력’의 관점에서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AI를 과학기술과 산업을 관통하는 국가 인프라로 구축해 ‘K AI 주권’을 확보하는 임무가 필요하다. 중국은 대규모 AI 모델을 과학연구와 제조·국방·의료에 동시에 투입하고 있고, 미국은 AI로 연구 생산성 자체를 끌어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AI를 특정 산업의 기술로 한정해 바라보며, 각 분야가 제각기 AI 적용을 추진하는 경향이 강하다. AI는 개별 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모든 연구와 산업의 속도를 좌우하는 기반 기술이다. 독자적인 AI 모델과 연산 자원, 플랫폼을 함께 구축해 이를 국가 차원의 인프라로 운영하고 이를 통해 AI의 전략적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곧 ‘K AI 주권’의 의미다. 나아가 이러한 기술적 역량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국가 임무로 귀결되어야 한다. 감염병·고령화·재해·재난 같은 사회적 위협에 대응하는 기술 개발을 개별 R&D 과제로 흩어둘 것이 아니라 ‘국민 생명 보호’라는 국가적 임무로 재구성해야 한다. 신약과 백신, 디지털 헬스케어, 재난 예측과 대응, 안전 인프라가 각기 명확한 임무 목표를 수행할 때, 과학기술의 성과는 비로소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가치로 체감될 수 있다.

전략 중심 임무 수행 체제로 방향 전환
최근 정부는 R&D 예비타당성조사 폐지를 추진하며, R&D의 속도를 가로막던 제도적 장벽을 낮추고 있다. 이는 시급하고도 도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결정이다. 남은 숙제는 5조 원 규모의 ‘K문샷’과 같은 대형 사업을 얼마나 빠르고 전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느냐에 있다. K문샷은 개별 기술을 지원하는 기존 R&D와 달리, 국가가 먼저 해결할 문제를 정하고 모든 연구 역량을 그 목표에 집중하는 실험대다. 성공을 위해서는 부처와 공공조직 간의 칸막이를 과감히 허물고, 현장을 책임지는 전문가에게 기획과 예산, 과제 조정에 대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제 K과학기술은 관리 중심의 행정을 넘어, 전략 중심의 임무 수행 체제로 방향을 전환할 때다. 과학기술 투자의 성패는 수많은 연구 성과를 나열하는 데서 결정되지 않는다. 국가가 설정한 핵심 목표를 얼마나 분명하게 해결했는지, 그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화살의 숫자가 아니다. 과녁이 얼마나 선명한가, 그리고 모든 역량이 그 방향으로 제대로 정렬돼 있는가다. 그것이 K과학기술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원리다.
◆홍성주=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정책자문관을 역임했다. 『과학기술 50년사』(2017)를 책임편찬했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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