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할망의 어깨에 놓인, 한라산에 몸을 숙인 읍성

이영천 2026. 1. 1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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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주인인 제주도 정의읍성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비바리(여자를 뜻하는 제주 방언)의 섬에 들었다. 그러나 어디서건 소나이(남자를 뜻하는 제주 방언)가 무시로 스쳐 지난다. 제주는 이제 더는 삼다도가 아닌가. 소나이들이 섬의 돌하르방을 닮았다.

애당초 성산포 고성리에 성을 쌓았었다. 지척의 왜구 침범이 일상이다시피 하였다. 평화를 좇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던가. 좋은 터를 찾아 읍성이 한라산 중산간으로 옮겨 왔다. 그리하여 정의읍성은 한라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 보는, 여기에 자리 잡게 되었다.
▲ 남문과 돌하르방 정의읍성 남문, 각진 옹성으로 드는 길에 돌하르방 넷이 둘로 나뉘어 섰다. 문으로 드는 객을 맞이하는 것일까.
ⓒ 이영천
새해가 시작된 1월 초, 남문 앞에 이르자 네 기의 돌하르방이 양쪽으로 둘씩 나누어 서 있다. 둥글고 큰 눈에, 남문으로 드는 그 누구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나보다 키 작은 하르방도 큰 하르방도 있으니, 지나는 객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수작일까.
서문과 동문에도 돌하르방이 있었다니, 무슨 사유가 있었을 터다. 설은 분분하다. 조선의 중흥기인 1754년 돌하르방이 탄생했다는 설이 대세를 이룬다. 돌하르방은 '벅수' 문화의 제주식 변형이다.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자 수호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 동문 읍성 안쪽에서 바라 본 동문. 이 동문 밖에도 돌하르방 넷이 서 있다.
ⓒ 이영천
제주에는 모두 마흔여덟의 돌하르방이 있었다. 제주읍성의 동·서·남문에 여덟씩 스물넷, 정의읍성과 대정읍성 세 대문에 넷씩 스물넷이다. 그 큰 눈에 내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 재빨리 남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주인인 성에 들자, 구불구불 골목이 반긴다. 돌담이 바람을 가르면, 바람이 다시 길을 안내한다. 객사에 이르자, 친근한 주막이 반갑다. 제주의 곡식과 물, 손길이 빚은 술이 있단다. 돌담이 막아주는 바람의 안쪽에 자리를 잡는다. 오메기술 한잔에 취기가 적당하다.
▲ 주막 정의읍성 객사 북쪽에 있는 '술 다끄는 집'이다. 술 빗는 재료 전시와 무료 시음은 물론 체험까지 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께서 전통을 잇고 있다.
ⓒ 이영천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본다. 성곽의 광배처럼 늘 따라다니는 한라산의 품이 넉넉하다. 돌담에 기대어 천천히 술을 들이켠다. 아련한 청춘의 발걸음이 뒷걸음으로 따라온다. 이 읍성에 처음 든 게 수학여행 때였던가.

약한 취기에, 이끼 낀 푸른 돌담을 만져본다. 돌담 틈으로 빠져나간 바람이 남쪽으로 휘몰아 간다. 살짝 오른 술기운에 한라산의 품으로 안겨본다. 옷 벗은 고목의 가지들이 하늘에 박힌 화석처럼 보인다. 성벽은 말이 없다. 북쪽엔 문을 두지 않고 성벽만 두었다. 문 없는 성벽을 한라의 바람이 넘나든다.

막힌 북벽, 유연한 골목

성안 길들이 예스럽다. 날카로운 직선이 아니다. 구부러져 유연하다. 빗각으로 이어진 길이, 곧장 시선을 닫아건다. 뭍의 읍성처럼 곧게 뻗은 축선이 아니다. 정면으로 바람을 맞지 않으려고 길마저 비켜 잇닿았고, 돌담은 바람을 흘려보낸다. 제주의 지혜다.
▲ 골목 정갈하게 단장된 골목과 돌담. 굵은 줄로 동여진 초가가 예스럽다. 성안 골목이 굽어 부드럽다.
ⓒ 이영천
한라산이 내뱉는 숨결이 제주의 바람인가. 그러니 제주 어디에서 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게 섬의 일상이다.
읍성이 순하다. 혹여 노기 서린 한라산이 거센 바람을 들이밀면 어쩌나. 그래서 북쪽은 문을 내지 않고 성벽을 두텁게 둘러서 쌓았다. 햇볕이 들어오는 남쪽 바다로 시선을 자연스레 이끄는, 의도된 배치다. 이 또한 제주의 지혜다.
▲ 근민헌 정의읍성의 관아인 '근민헌'이다. 읍성의 북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마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선 자세다.
ⓒ 이영천
북벽 아래 근민헌(近民軒)이 앉았다.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라지만, 자세히 보니 오히려 바람을 막아내는 등받이 같다. 막힌 성벽은 이 마을의 뒤쪽이 아니다. 오히려 등짝이다. 문을 생략한 자리에 집들이 너끈하게 기댔다.

바람이 한라산과 바다를 잇고 있다. 그래서인지 홍진(紅塵)의 세상도 감히 이곳까진 침범하지 못했다. 산과 바다가 알려 준 숨결만이, 바람을 타고 넘나들 뿐이다. 그러니 초가지붕이 굵은 줄에 단단히 묶였다.

백성과 함께하려는 동헌이 동쪽이 아닌 북서쪽에 자리했다. 마치 거센 북서풍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겠다는 결기처럼 보인다. 이름마저 '백성 가까이에서 함께 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위압적이지 않은 크기에,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모습이 친근하다. 제주의 공동체문화인 '괸당'의 숨결이 이곳에도 깃들어 있어서일까.

한라산을 향한 경배

육지 성들이 뒷산을 타고 앉아 위압적인 자세라면, 정의읍성은 한라에 몸을 숙인 복종에 가깝다. 나머지 역할을 객사가 대신한다. 굵은 성벽이 차단보다는 예의처럼 여겨진다. 한라가 읍성의 버팀목이자, 터전이기 때문이다.
▲ 서문 가벼운 현무암이 성벽 재료여서, 성벽을 육지의 그것보다 훨씬 두텁게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문루는 서문이다.
ⓒ 이영천
적석총처럼, 현무암을 겹겹이 층으로 쌓았다. 다공질 검은 돌들이 성벽을 이뤘다. 가벼운 돌을 바람과 비에 맞설 수 있도록 두텁게 엇물렸다. 둘레는 천사백여 미터 남짓에, 높이는 어른 키 두세 배쯤 된다.

완만한 구릉을 따라 네모나게 둘러앉았다. 구멍 숭숭한 현무암이라 그런지, 두꺼운 성벽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바람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들숨으로 바람을 품어 내는 성벽이다.

한라산은 오래전 설문대할망이 바다 위에 세운 불기둥이다. 시간에 불기둥이 사그라들자, 한라산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녀의 품에서, 비바람에 깎이고 부서지더니 돌과 흙을 쏟아냈다. 돌들이 쌓여 골목을 이루고, 밭과 마을의 경계도 둘렀다. 그리고 성이 되었다. 그 덕분일까, 성안 집들도 작으나마 두루 텃밭을 갖게 되었다.

정의읍성은 설문대할망의 어깨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할망의 숨결처럼 바람이 무시로 성안을 넘나든다. 성안 사람들이 그 바람을 들이마시며 살아왔다. 읍성이 택한 복종은 그래서 숙명일지도 모른다. 할망에게 바치는 기도에 가깝다. 한라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처럼 마음으로 늘 산을 경배한다.
▲ 정의읍성 객사 읍성의 한가운데에서, 한라산을 향해 고개 숙인 읍성을 대신해, 절제된 최소한의 권위만을 드러낸다.
ⓒ 이영천
해의 궤적이 바뀌어도, 읍성이 머릴 숙이는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한라산 기운이 성벽을 타며 넘나들고, 돌담 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안녕을 비는 염원처럼 퍼져나간다. 돌로 성을 쌓았을망정, 그 바탕은 바람의 차지인 셈이다. 그 바람 속에는, 할망의 숨결이 늘 푸근하게 감돈다.

바람이 골목을 휩쓸면, 객들이 그 뒤를 따른다. 걸음이 흩어지면 골목도 꺾인다. 그 자리에 다시 바람이 머문다. 제주의 바람은 흘려보내면서 동시에 품어 내는 존재다. 돌담의 이끼와 초가지붕 위 풀까지, 바람이 품어서 길러낸 것들이다.

숨 쉬는 오래된 마을

순천 낙안읍성이 박제된 전통이라면, 정의읍성은 발효된 전통이다. 낙안읍성이 돌 위에 과거를 봉인해 두었다면, 정의읍성은 돌 아래 남몰래 오늘을 품고 있다. 전통과 시간은 바라보는 전시물이 아니란다. 여기서는 살아내는 삶의 호흡으로, 꿈틀거린다.
▲ 정의군(1872년_지방지도) 한라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와 물길, 그리고 마을을 연결하는 옛 길이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진(鎭)은 붉은 색으로, 읍성도 간결하게 묘사되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1872년 정의현 지방지도에서 성곽은 객에 불과하다. 백록담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와 물줄기를 굵은 뼈대와 살처럼 보여 주니 말이다. 성곽은 네모에 객사와 동헌만 단출하게 그려 넣었을 뿐이다.

그보다 더 나이 든 건 사람들 발길이다. 성문으로 드나든 발자국이 낙관처럼 찍혔고, 담장 아래엔 옛 정취가 햇살로 스몄다. 포근한 햇볕이 흙냄새를 돋워내고, 현무암 돌담에는 세월의 푸르른 이끼가 겹겹이 포개졌다.

돌담에 기대어 아련한 회상에 젖는다. 오랜 발자국 틈새에서 젊었을 내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 자리에 푸르던 내 꿈도 같이 찍혀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내 젊음이 이내 흩어져 버린다. 한라산이 보낸 할망의 숨결이, 위로하듯 내 등을 토닥여준다.
▲ 정의조점(탐라순력도)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 곳곳의 읍성과 진(鎭) 등을 돌아 본 내용을 그림으로 남긴 게 '탐라순력도'다. 그 중 정의조점은 군사와 행정에 대한 점검으로, 특히 말과 기병의 훈련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기마병과 읍성 안의 말, 남문 밖 말들이 인상적이다.
ⓒ 제주특별자치도
문득 제주의 말(馬)이 떠올랐다. 탐라순력도 중 '정의조점'은 말이 점검과 순시의 주인공이다. 몽골이 들인 말이, 제주의 것이 되었다. 한라의 풀과 물이 말을 길러냈다. 바람도 거들었다. 그 말들을 길들여 뭍으로 보냈다.
비바람이 성을 무너뜨리면 섬사람들이 다시 쌓았고, 돌담이 무너져도 또한 그러했다. 돌을 들었던 손바닥 물집만큼이나, 이곳 사람들 삶은 질기고도 단단했다. 사시사철 바람과 맞서면서 바람에 휘지도 않았다. 유연한 생명력, 그것이 육지와 다른 제주의 정신이고 읍성이 살아남은 바탕이다.
▲ 정의 향교 뭍의 향교가 통상 성 밖에 자리하는 반면, 정의 향교는 읍성 안에 들어 와 있다. 서문 북쪽에 자리한다.
ⓒ 이영천
해가 기울자, 서쪽에 있는 향교가 붉은 노을을 받아안는다. 골목을 누비던 햇볕이 노을에 잦아들고, 집들이 등불을 밝힌다. 성 안팎으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느릿해진 시간이 어둠으로 흐른다. 그때 약속하지 않은 읍성이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낸다. 읍성의 하루가 고요에 잠긴다.

돌담은 나이 들어도, 거기 부딪히는 바람은 언제나 젊음이다. 둘이 만나는 곳에서 잠든 성곽이 다시 깨어날 힘을 얻는다. 그러면 화석 같던 고목도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그래서 이 읍성은 박제된 유적이 아닌, 숨 쉬는 마을이다. 바람에 적응하며 살아온, 모두가 기억하는 오래된 마을이다. 한라산 숨결이, 돌로 쌓은 이 읍성을 지켜냈다. 그게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제주의 방식이고, 정의읍성이 지금까지 건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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