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후세대 닮은 르완다의 엄마들, ‘빈곤졸업’ 비탈길 올라
룻지로 차밭에서 만난 희망, 르완다인과 한국인의 동행

국민 다수가 기독교인인 르완다의 성장은 ‘기적’에 가깝다. 1994년 동족상잔의 대학살 비극을 겪으면서 국가 기반이 전멸했던 르완다는 2000년대 들어서며 반전의 드라마를 썼다. 지난 20여년간 연평균 7%대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유지해왔고, 지난해에는 8.89%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고속 성장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수도 키갈리뿐 아니라 첩첩산중인 서부 시골 마을까지 반듯한 포장도로가 혈관처럼 뻗어 나가는 모습은 흡사 한국의 70년대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한다. 거리 곳곳에는 빗자루를 들고나와 마을을 청소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자체 조립·생산할 만큼 기술적인 자생력도 갖췄다.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명은 천개의 언덕을 가졌다는 르완다의 녹 푸른 산간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이 놀라운 경제 지표가 만들어낸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눈부신 숫자와 풍경 안쪽으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여전히 치열한 생존의 민낯이 드러난다. 르완다 서부 룻지로(Rutsiro). 서쪽으로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키부 호수(Lake Kivu)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도로는 정갈하지만, 그 도로 끝 흙길에는 아이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온종일 찻잎을 따는 여성들이 있다.

수도 키갈리의 번듯한 사무직 노동자가 한 달에 평균 550달러(약 77만원)를 벌 때, 이곳의 여성들은 가파른 비탈에서 온종일 일하고 1500프랑(약 1500원) 남짓을 손에 쥔다. 20년 넘게 이어진 고속 성장의 온기가 아직 닿지 않은 가파른 ‘빈부의 절벽’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간) 국민일보는 월드비전(회장 조명환)과 김포두란노교회(이상문 목사)와 함께한 ‘밀알의 기적’ 프로젝트를 통해 르완다를 찾아 이 절벽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룻지로 월드비전 지역개발사업장(AP) 사무소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콩고에서 유년기를 보낸 르완다인 아론(Aaron·56) 퉁가 클러스터(지역 단위) 총괄 매니저, 한국에서 35년 평생을 월드비전 해외원조사업에 매진해 온 이정임(57) 코이카(KOICA) 사업 프로젝트 매니저(PM)이다.
아론 매니저는 르완다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르완다인이지만 콩고에서 나고 자랐다. 식민지 시절 열강이 국경선을 확정하면서 조부모 세대부터 타의로 국경 밖에서 살아야 했던 ‘디아스포라’였다. 그는 1996년, 제노사이드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와 대학을 마쳤다.
그는 2004년 월드비전에 봉사자로 시작해 20년 넘게 이곳을 지켰다. 아론 매니저는 “처음 왔을 때 이곳은 전쟁 후유증으로 모든 인프라가 파괴된 상태였다”며 “정부 행정력조차 닿지 않는 깊은 언덕 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 조직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정임 PM은 아론이 20년간 다져놓은 그 ‘터’ 위에 한국의 경험을 이식하기 위해 왔다. 월드비전 한국 본부에서 35년을 근무한 그는 정년을 앞두고 현장 근무를 자원했다. 이 PM은 “아론 매니저가 닦아놓은 단단한 신뢰 자본과 데이터가 없었다면 코이카의 대규모 프로젝트도 겉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룻지로에서 펼친 ‘코이카 1단계 사업(2021~2023)’의 핵심은 ‘여성 가장들의 소득 증대’였다. 이정임 PM은 수많은 ‘여성’에 집중한 이유에 대해 “남성에게 소득이 생기면 개인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발생하지만, 여성이 돈을 벌면 그 혜택은 오롯이 아이들과 가정으로 흘러간다”며 “특히 이곳의 여성들은 한국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우리를 키워낸 할머니 세대처럼, 가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억척스러운 생존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사업은 ‘빈곤졸업 모델’을 통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1인당 월 8500프랑(약 8500원) 정도의 초기 현금 지원으로 긴급한 가정을 구호한다. 이후 과정은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다. 염소나 농지 등 생산 수단을 제공해 소득원을 만든다. 최종적으로 저축 그룹에 가입해 금융 자립을 이루게 하는 방식이다. 이 PM은 “1단계 사업 당시 299가구가 참여했는데, 이 중 80가구가 빈곤선 위로 올라와 졸업했다”고 전했다.
월드비전 르완다 통계에 따르면, 해당 지역 사업 시작 전인 2016년 47%에 불과했던 식수 접근성은 2021년 84%까지 치솟았다. 깨끗한 물이 공급되고 소득이 늘자, 5세 미만 아동의 발육부진(Stunting) 비율과 저체중 비율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 PM은 “엄마의 소득이 늘어나자 아이들의 영양 상태와 학교 출석률도 동반 상승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이 성공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재 진행 중인 2단계 사업은 지원 대상을 594가구로 대폭 확대했다.
하지만 외부의 지원은 영원하지 않다. 아론 매니저는 지난해 4월, 현장이 발칵 뒤집혔던 충격적인 사건을 털어놓았다. 미국의 코이카 격인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르완다 사업 철수를 결정하고 빠져나간 것이다. 현지에서 일하던 직원 40명은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론은 “수십 년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원조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주민들과 직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언제까지나 외부의 손길만 기다릴 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현장을 덮쳤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진짜 자립’을 위한 움직임을 촉발했다. 월드비전은 지난해 10월부터 르완다 내에서 자체 모금(Local Fundraising)을 시작했다. 해외 후원금에만 의존하던 구조를 깨고, 르완다 내부의 자원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첫 시도다. 아론은 “아직 시작 단계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졸업’이자 ‘자립’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PM은 “단순히 물자를 지원하는 시혜가 아니라, 미래의 동반자로서 신뢰를 쌓는 ‘민간 외교’의 현장”이라며 “르완다의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지금은 우리가 돕고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이 저출산 고령화에 빠진 우리나라에 도움을 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대학살의 상처가 남은 국경 마을, 1500원짜리 노동과 8.8%의 고속 성장이 공존하는 모순의 땅에서 20년을 버틴 힘은 무엇일까. 아론 매니저는 자신이 매일 아침 출근길에 되뇌는 기도를 고백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나의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라는 밥 피어스 목사님의 기도를 매일 마음에 새긴다”며 “우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지만, 동시에 가난과 불의에 무뎌지지 않고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가는 ‘청지기’라는 마음으로 일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을 믿는다. 우리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분들에게 더 많은 돈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따뜻한 심장을 간직하기를 기도한다”며 “우리 주민들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구걸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서서 남에게 베푸는 ‘존엄’을 회복하는 날까지 이 밭을 갈 것”이라고 전했다.
룻지로(르완다)=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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