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 넘어 이젠 구조적 불황?…위기의 ‘K배터리’ [스페셜리포트]
국내 배터리 업계가 ‘공포의 한겨울’을 보내고 있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 SK온, 엘앤에프 등 주요 배터리 업체 수주 계약이 잇따라 취소돼 혹한기를 맞았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을 넘어 구조적 불황에 접어들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엘앤에프, 테슬라 공급 사실상 불발
2차전지 소재 기업 엘앤에프는 최근 미국 테슬라와 체결한 하이니켈 양극재 공급 계약 금액이 기존 3조8347억원에서 973만원으로 감액됐다고 공시했다. 계약 금액이 1000만원에도 못 미쳐 사실상 거의 공급을 못했다는 의미다.
이번 계약은 2024년 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2년간 테슬라의 전기 픽업트럭 ‘사이버트럭’에 들어갈 배터리용 양극재를 공급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테슬라 사이버트럭 판매가 주춤해 발주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 됐다. 블룸버그는 “엘앤에프 물량은 사이버트럭에 사용될 배터리 소재였는데, 개발이 늦어지고 판매량이 저조해 엘앤에프가 타격을 입게 됐다”고 보도했다.
국내 1위 전기차 배터리 업체 LG에너지솔루션 사정은 더 심각하다. 미국 포드(9조6030억원), FBPS(3조9217억원)로부터 줄줄이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왔다. 무려 13조5000억원에 달하는 물량이다. 포드가 전기 픽업트럭 생산을 중단하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과 배터리 팩을 제조하는 미국 FEBS의 자회사 FBPS가 전기버스 사업을 철수하기로 한 탓이다.
최근엔 LG에너지솔루션과 GM의 미국 합작법인인 얼티엄셀즈 오하이오, 테네시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전기차 수요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한 영향이다. 주민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얼티엄셀즈 가동 중단이 LG에너지솔루션 투자 심리 측면에서 비관의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LG에너지솔루션 실적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2025년 4분기에만 909억원 영업손실을 낼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금액을 제외하면 적자 규모가 4000억원대로 불어날 것이란 우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악재가 쏟아지자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공장 등 자산 매각으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완성차 업체 혼다와 합작한 4조2000억원 규모 오하이오 공장 건물을 혼다 미국법인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성장세가 둔화한 만큼 목돈을 공장에 묶어두기보다 합작법인 운영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판단에서다.
포스코그룹의 2차전지 소재 계열사 포스코퓨처엠 분위기도 좋지 않다. 2023~2025년 완성차 업체 GM에 13조7697억원 규모의 양극재를 공급하기로 했는데, 실제 공급 물량은 2조8112억원 수준에 그쳤다고 공시했다. 당초 계약 금액 대비 20% 수준에 그쳤다는 의미다.
SK그룹 배터리 제조사 SK온은 최근 충남 서산3공장 증설 계획을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투자 금액은 1조7534억원에서 9363억원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3공장은 2023년 착공 당시 “SK온의 국내 최대 규모 투자액을 바탕으로 생산 속도를 높인 스마트팩토리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힐 정도로 핵심 거점이었지만, 투자 종료 시점을 기존 2025년 말에서 2026년 말로 미뤘다. 올해로 예정된 공장 가동 시점도 예측하기 어렵다. SK온은 또 미국 포드와 만든 배터리 합작법인을 해체해 결별을 선언했다.
이 여파로 SK온 실적 전망도 불투명하다. 2025년 3분기 영업손실은 1248억원으로 전 분기(664억원) 대비 적자폭이 2배가량 커졌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온은 올해 4372억원 적자를 낼 전망이다. 당분간 흑자전환은 요원하다는 우려다.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을 만드는 SKC도 차세대 양극재 사업 진출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차세대 양극재는 SKC가 중장기 성장 전략으로 앞세운 신사업이었는데, 배터리 업계 분위기가 악화되자 아예 사업을 접었다는 분석이다.

전기차 보조금 폐지에 美 시장 찬바람
국내 배터리 업계 악몽의 진원지는 미국이다. K배터리 주력 무대인 미국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될 조짐을 보이자 배터리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2022~2023년까지만 해도 연평균 50%씩 급성장했지만 상승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2025년 들어 분위기가 냉각돼 1~11월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113만5552대로 전년 대비 2% 늘어나는 데 그쳤다(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자료). 연말로 갈수록 분위기는 더욱 악화됐다. 1~9월에는 매달 평균 전기차가 11만대씩 팔렸는데, 10월과 11월은 2개월 연속 판매량이 7만대를 밑돌았다.
이는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전기차 정책 영향이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 전기차를 살 때 지원하던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 보조금을 폐지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전기차 구입 부담이 커지며 판매량이 곤두박질쳤다. 신영증권은 “2026년 미국 전기차 판매량이 2025년보다 16%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여파로 미국 전기차 1위 업체인 테슬라부터 직격탄을 맞았다. 테슬라는 2025년 4분기 판매량이 42만2850대로 전년 대비 약 15% 감소했을 것이라는 시장 컨센서스(증권가 전망치)를 공개했다. 2025년 2분기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13.5% 줄어 시장 우려가 컸는데, 이보다 감소폭이 더 크다. 연간 기준으로도 2026년 전체 판매량은 164만752대로 전년 대비 8.3% 줄어, 2년 연속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 분위기도 좋지 않다. EU 집행위원회는 2035년까지 판매되는 모든 신차의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하겠다는 기존 계획을 지난해 말 철회했다. 대신 자동차 제조사들이 2035년 이후에도 2021년 대비 90% 수준으로 배출가스를 감축하도록 했다.
완성차 기업들이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려면 사실상 모든 신차를 전기차로 판매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규제 완화로 내연기관차나 하이브리드차도 생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전동화 전략을 전면 수정하며 발 빠르게 대응하는 분위기다.
포드는 간판 차종인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차세대 전기 픽업트럭 ‘T3’와 전기 상용밴 개발도 취소했다. 대신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에 집중하는 쪽으로 사업 계획을 재편하기로 했다. 혼다는 2027년부터 선보이기로 한 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중단하고 2031년까지 전기차, 소프트웨어(SW) 개발에 투입할 자금을 10조엔에서 7조엔으로 30% 줄였다. 현대차도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서 전기차 생산을 줄이고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글로벌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생산에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만큼 당분간 배터리 업계 실적 회복이 녹록지 않을 것이란 우려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이 급감해 테슬라를 비롯한 전기차 업체들이 가격 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며 “배터리와 소재 업체들은 공급 단가 인하 압력으로 경영난이 더욱 악화될 우려가 크다”고 귀띔했다.

CATL 점유율 갈수록 높아져
문제는 K배터리가 주춤하는 사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이 빈틈을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전기차 시장 성장 속도가 주춤해지자 CATL을 비롯한 중국 배터리 기업이 유럽 시장 공략에 힘쓰는 중이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1~10월 27.2%였던 CATL의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중국 시장 제외)은 2025년 같은 기간 29.2%로 더 높아졌다. 중국 BYD 점유율 역시 4.1%에서 7.6%로 치솟았다.
이에 비해 LG에너지솔루션 점유율은 같은 기간 24.2%에서 21%로 줄었다. SK온(10.7% → 9.9%), 삼성SDI(9% → 6.6%) 등 국내 빅3 업체 점유율도 일제히 하락세를 보이며 존재감이 약해졌다.
점유율 격차는 더 벌어질 우려가 크다. 줄줄이 계약 취소 사태를 맞는 K배터리 업체와 달리, CATL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의 협력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 모습이다. SK온과 결별하면서도 CATL 기술을 빌려 설비를 확장 중인 포드가 대표적이다. 포드는 CATL로부터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기술 라이선스를 받아 미시간주 공장 건설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SK온과 갈라선 포드 켄터키 공장도 CATL 기술을 활용해 ESS 생산시설로 바꾼다는 방침이다.
CATL은 유럽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낸다. 헝가리에 짓는 연산 4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올해 가동할 계획이다. 실적도 날개를 달았다. 2025년 3분기 순이익이 185억4900만위안(약 3조7000억원)을 기록해 전 분기 대비 33.7%, 전년 동기 대비 41.2% 증가했다. CATL은 테슬라, BMW, 폭스바겐 등 주요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해왔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전문위원은 “K배터리 업체의 핵심 시장인 미국과 EU 판매 부진이 뼈아프다”며 “가성비 좋은 중국산 LFP 배터리가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늘려가는 대신 K배터리 업체의 삼원계 배터리 수요는 감소한 것이 결정타”라고 진단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린 K배터리 산업을 보면, 10여년 전 국내 태양광 폴리실리콘 산업이 고사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란 우려도 나온다.
2010년대 초반 국내 태양광 업체는 글로벌 신재생에너지 열풍 속에 수조원대 장기 공급계약을 맺고, 대규모 차입을 통해 대대적인 공장 증설에 나섰다. 하지만 중국의 저가 공세, 글로벌 경기 침체로 폴리실리콘 가격이 폭락하자, 글로벌 고객사들은 위약금을 물거나 파산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잇따라 파기했다. 사실상 중국과의 경쟁에서 패배를 선언한 격이다. 재계 관계자는 “K배터리 업체들은 전기차 캐즘 핑계를 대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독주하는 중국 업체와의 점유율 격차가 벌어지는 점은 위기 요인”이라며 “이대로 가면 K배터리 존재감이 더욱 약해질 우려가 크다”고 귀띔했다.
ESS로 돌파구 찾지만
실적 개선 한계…차세대 기술 확보해야
코너에 내몰린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새 먹거리로 불리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공략에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 6월 미국 미시간주 공장에서 ESS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양산에 돌입했다. 2027년부터는 국내 오창공장에서도 1GWh 규모 배터리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SK온은 충남 서산공장에서 ESS용 LFP 배터리 양산 검증을 끝냈다. 미국 조지아주 공장 일부 생산라인을 LPF 배터리로 바꿔 새해부터 양산에 들어간다. 삼성SDI도 인디애나주 스텔란티스 합작공장 생산라인을 ESS용으로 바꾸는 중이다.
배터리 업체들이 ESS 시장 공략에 나서는 것은 ESS 시장 분위기가 좋기 때문이다. 전기를 미리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ESS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을 위한 핵심 장치로 급부상했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 규모는 2024년 235GWh에서 2035년 618GWh로 2.5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미국 정부의 투자세액공제(ITC) 정책도 호재다. 올해부터 배터리 원가 중 비(非)중국산 부품 비율이 55%를 넘어야만 최대 30%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ESS 사업자들이 중국산 배터리 대신 한국산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배터리 업계가 ESS로 돌파구를 찾지만 실적 반전을 이끌 정도의 파급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나온다.
최문선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위축된 만큼 ESS 수요가 이를 대체해야 하지만, 미국 ESS 시장 성장률은 예상보다 높지 않다”며 “현지 공장 생산능력에 비해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아 국내 배터리 업체 실적 부진을 만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SS는 전기차 배터리 대비 수익성이 낮고, 계약 기간도 짧은 편이다. 데이터센터 건설 시점에 따라 일시적인 수요가 발생하지만, 전기차 배터리처럼 6~10년 단위의 장기 계약은 흔치 않다. 그만큼 안정적인 매출 확보가 어렵고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 기업에 밀린다는 점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국내 배터리 산업이 글로벌 시장 패권을 되찾기 위해선 주요 설비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차세대 배터리 기술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적 부진에 위축되는 사이 고성능 차세대 배터리 개발이 지연될 경우, 향후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LFP뿐 아니라 리튬망간리치(LMR), 나트륨이온 배터리 같은 차세대 중저가 배터리 개발과 양산을 서둘러야 한다”며 “앞으로 주요 격전지는 이들 신기술 배터리 시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LMR 배터리는 양극재 내 리튬과 망간 함량을 높인 리튬이온 배터리다. 기존 배터리와 비교해 에너지 밀도가 높아 중저가 배터리 시장에서 ‘LFP 배터리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나트륨이온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 대비 원가가 낮고, 저온 환경에서 안전성이 높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탈중국 전략을 앞세워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설득력 있다. 황경인 전문위원은 “ESS 외에도 군용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고성능 배터리 수요가 높은 미래 산업군을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이들 산업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 분야로, K배터리 업체에 새로운 시장 기회를 열어줄 잠재력이 크다”고 진단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3호 (2026.01.14~01.20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c) 매경AX.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네이버도 미래에셋도 ‘깃발’ 꽂는다…가상자산 ‘웹3’ 패권 경쟁 서막- 매경ECONOMY
- 코스피 투자 종목 고민하시나요...펀드매니저 647人이 뽑은 상반기 포트폴리오 [스페셜리포트]-
- 현실이 된 차세대 무기…‘드론’ 선두 주자 어디? [미장 보석주]- 매경ECONOMY
- “5인 미만 사업장도 예외없이···” 근로기준법 적용 확대 급물살- 매경ECONOMY
- “일주일 새 40% 올랐다고?”…전운 속 질주하는 ETF- 매경ECONOMY
- “자기야, 그 아파트 계약해! ‘째깍악어’ 들어온대”…온라인 플랫폼, 오프라인 강자 된 비결-
- 집안싸움 벌이다 테슬라에 허 찔려…현대차 ‘자율주행 로드맵’ 이상 없나요- 매경ECONOMY
- “반도체株 안 부러워요”...‘돈로주의’에 방산주 불기둥- 매경ECONOMY
- ‘국민의 연금’인가 ‘정부의 지갑’인가…정치적 동원 가속화하는 ‘국민연금’- 매경ECONOMY
- ‘쉬었음’ 장기화…먼저 겪은 일본은 어땠나 [스페셜리포트]- 매경ECON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