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의 진정]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2026. 1. 1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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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소설가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서 레지던스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도시를 선택한 이유는 을숙도와 낙동강 하류, 겨울 철새 도래지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나는 순천만을 시작으로 서천과 군산 금강하구 철새도래지를 돌아보았다. 본격적인 탐조활동은 아니고 그저 새들의 장소에 머물다 오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다. 이번 기회에 을숙도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주남저수지까지 둘러볼 계획이다.

「 맞춤법 틀린 ‘냇과의원’ 간판
진료보다 하소연 상담이 주업
얼결에 심장박동 청진기 진단
어쩐지 철새 날갯짓 소리 닮아

김지윤 기자

여행 가방 싸는 데는 제법 능숙하다 자부하지만, 이번 만큼은 며칠 고심해서 짐을 꾸렸다. 여행자와 거주자를 오가는 ‘여행과 나날’을 위한 짐. 가방 하나에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있어야 하는 것과 있으면 좋은 것 사이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것만 선별해서. 남극 기지로 출발하는 사람처럼 일단 출발하고 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듯, 긴장감을 가지고 짐을 챙겼다. 목표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였는데, 추울까 불편할까 모자랄까 근심 걱정이 결국 24인치 캐리어에 백팩을 모두 채웠다.

막상 짐을 풀어보니 칫솔은 주머니마다 하나씩 모두 세 개, 텀블러를 크기별로 두 개나 챙겼으면서 정작 반드시 필요한 약주머니는 통째로 두고 왔다. 비상약이야 그렇다 쳐도 일정한 시간에 복용해야 하는 처방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일단 제일 가까운 병원을 검색해 찾아 나섰다. 보험청구용으로 찍어둔 진단서가 있으니 처방전을 받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듯했다.

구조나 가구 집기들로 보아 제법 오래된 의원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와 진료를 마치고 나온 더 늙은 할머니의 대화로 볼 때, 서로의 사정까지 다 알고 지내는 단골들만의 병원인 듯했다. 할머니가 진료실에 들어간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아주 꼼꼼하게 진료를 봐주시나 보다 했다. 나이든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치매기가 있잖아. 하루가 멀다고 와. 소화가 안 되고 허리가 쑤시고. 어제 처방전 줬는데 오늘 또 약 내놓으래. 약을 그렇게 드시니 소화가 안 되지. 오늘은 아들이 돈 훔쳐갔다고 하소연이네. 원장님은 그걸 또 다 들어줘. 왜 그걸 다 들어주고 있냐고 힘들게. 이제 그만 나오라고 해야겠다.

내가 들은 것이 환자의 비밀인지 간호사의 하소연인지 헷갈렸다. 간호사가 몇 번 더 재촉을 한 끝에 차례가 왔다. 그리고 진료실 의자에 앉았을 때 마주한 것은 의사의 불안한 상태였다. 얼굴이 거의 책상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굽고, 의사소통이 되려나 싶을 정도로 노쇠한 의사가, 겨우 고개를 치켜들며 내게 물었다.

어디가 불편해? 불편한 거 있으면 다 말해. 힘든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다 들어줄게. 딱히 힘들고 불편한 건 없는데. 내가 이 도시에 온 이유가 겨울 철새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고 추궁하는 듯했다. 지금 제일 고통스러운 게 뭐야? 말해봐. 고통스러운 건 없는데. 저 깊은 곳 통증을 끌어올려야 하나 어쩌나. 내게서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엔 다른 걸 들어야겠다 나섰다.

어디 심장 소리 좀 들어보자.

숨소리도 아니고 심장 소리. 다짜고짜 청진기를 들이대는 바람에 얼결에 외투를 벌리고 가슴을 밀었다. 이곳저곳 청진기가 지나갔다.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겠나 싶은 곳까지 구석구석. 이윽고 의사가 진단을 마치며 환하게 웃었다.

잘 뛰고 있네. 잘 뛰고 있어.

못 뛰고 있으면 죽은 거라고요 할 뻔했다. 진료를 한 게 아니라 치료를 받은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타인의 심장박동 치료법인가? 필요한 처방전은 받아 챙겼으니 됐고. 병원을 나서면서 계단 입구에 걸린 간판을 살펴보았다. 내과가 아니라 정신과였나. 병원이 아니라 상담소였나. 나무간판에 명조체로 새겨진 병원 이름. ‘OOO냇과의원’. 내과가 아니라 냇과. 사이시옷 맞춤법 개정이 도입된 지가 대략 40년 전. 그런데 개정 이전에도 내과 아니었나? 내과가 아니라 냇가를 잘못 적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곳에서 그는 얼마나 오랜 기간 청진기 소리를 들었나. 매일매일이 늙은이들의 하소연인 그의 나날에서, 짐을 잘못 꾸려 우연히 발을 들인 여행에서. 청진기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렸나. 잘 뛰고 있는 중년 여자의 심장 소리는 어땠을까.

을숙도 갈대밭에 서서 큰기러기 떼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잘 뛰고 있니? 쿵쿵. 오랜만에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새떼들의 날갯짓 소리와 비슷했다. 그래서 언제였나? 당신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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