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앞에서 카페 운영한 군인들의 정체... 소름 돋는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1. 1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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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바로잡은 역사] 보안사 간첩조작 사건

[김종성 기자]

 1990년 10월 당시 윤석양 이병의 폭로 이후 보안사가 직접 운영해온 것으로 밝혀진 서울대 인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모비딕 레스토랑의 모습.
ⓒ 연합뉴스
1989년에 조성된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이 노재봉 총리서리 임명(1990.12.27.)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기 전인 1990년 10월 4일 목요일이었다. 일요일부터 시작된 닷새 간의 추석 연휴 마지막인 이날,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7층에서 국군보안사령부 탈영병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보안사 현역 장교가 서울대 부근에 '모비딕'이라는 위장 카페(술집)를 차려놓고 보안사 서빙고분실 사병이 거기서 웨이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보안사의 민간 침투는 깊숙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해 12월 5일 자 <한겨레>는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 탄식하면서 "그동안 정부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비밀로 소문이 무성하던 보안사의 탈법·월권적 대민 사찰의 실상이 구체적 증거자료를 통해 생생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라는 말로써 10월 4일 이후로 국민들이 받은 충격을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정리했다.

민간인 사찰 통해 간첩 조작

보안사가 이처럼 대민 사찰로 나아간 것은 사실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다. 보안사의 최초 창설자인 이승만이 이 기구의 원형을 만들어낸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 (2차)> 보고서는 "보안사령부는 대한관찰부와 특별정보대에서 시작되어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 육군본부 특무부대, 방첩대를 거쳐 보안사령부가 되었다"라고 한 뒤 "1948년 설치된 대한관찰부의 목적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통해 확인된다"라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대한관찰부를 대통령 직속으로 사행어사 격으로 발동하는 기관, 그 후속 기관인 사정국을 대통령 직속 아래 모든 정치관계 기타를 정탐하는 기관으로 각각 정의하고, 비행이 발견된 정·관계 인사들을 감봉·정직·파면 등 법의 처단을 받게 하는 곳이라 하였다."

사(私)는 '개인'이나 '불법'뿐 아니라 '비밀'도 뜻했으므로, 이승만이 말한 사행(私行)어사는 암행어사와 비슷했다. 그가 민간 정치사찰을 목적으로 만들어낸 이 같은 사행어사들을 1972년 1월 17일에 맞닥트린 인물이 포항의 노조활동가인 이인국이다.

이인국은 대한관찰부의 후신인 육군보안사령부가 그달 29일에 발표한 대형 공안사건의 피해자다. 이날 발행된 <매일경제>는 보안사가 제공한 이인국의 프로필을 이렇게 보도했다.

"간첩 이인국(48·포항시 덕수동 908): 60년 9월 임창술에게 포섭되어 '(1)포항 노조에 지하당 조직, (2) 노조간부 포섭, (3) 노조행위 조성, 유사시 무력폭동으로 유도 등'의 지령을 수행하려고 암약하다 체포."

임창술이라는 인물이 남파간첩으로 보인다는 신고가 1971년 연말에 503보안부대로 신고됐다. 이를 토대로 보안부대가 임창술과 접촉한 인물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이인국이 붙들렸다. 이인국에게 적용된 혐의는 일반적 의미의 간첩죄뿐만이 아니었다. 민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도 함께 적용됐다. 위 기사의 내용이다.

"육군보안사령부는 29일 상오 민중봉기와 무력유격활동으로 현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비상사태 선언 이후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사회혼란을 조성한 후 일단 유사시에 대비, 재남(在南) 고정간첩의 역량을 점검하는 등 새로운 차원의 활동을 전개하려던 간첩 7개 망의 임창술 등 23명을 지난 17일부터 서울·대구 등지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1971년 4·27 대선으로 3선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헌법이나 법률로는 대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해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런데 1969년에 개정된 당시 헌법 제75조 제1항은 '국가비상사태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했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는 종래의 계엄이나 위수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헌법이나 법률에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비상사태라는 생소한 조치를 발포한 뒤에야 이에 관한 법적 근거 마련에 착수했다. 1971년 5·25 총선에서 총 204석 중 113석을 획득한 민주공화당은 12월 27일에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은 "사전대비조치"(제2조) 성격의 국가비상사태를 규정했다. 계엄을 선포할 명분이 없는 경우에도 사실상의 계엄 상태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사태를 먼저 선포하고 3주 뒤에 비상사태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나중에 만든 것은 법적 근거뿐만이 아니었다. 비상사태 선포를 합리화시켜줄 급박한 위기상황도 나중에 조작했다. 비상사태 선포 1개월 뒤에 노조 활동가 이인국 등이 체포된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보위특별조치법 제9조는 국가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이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을 이유 없이 만든 게 아님을 입증해야 할 상황에서, '민란을 획책하는 노조 활동가 이인국' 등이 보안사령부에 의해 일망타진됐다는 보도들이 나왔던 것이다.

재심에서 무죄 선고 요청한 검찰
  1972년 1월 29일 매일경제 <간첩 7개 망 23명 일망타진> 기사. 이인국씨는 대형 공안사건의 피해자였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이인국은 한국노총 포항지부 사무장이자 주식회사 문명주조 직공감독이었다. 지역 노동계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도 입지가 두터운 활동가였다. 이런 유형의 인물들을 '북괴 간첩' 겸 민란 음모자로 만들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정당화하고자 1972년 1월에 '사행어사'들이 여기저기 파견됐던 것이다.

그런데 보안사는 그런 수사를 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보안사가 아무 권한도 없이 이인국을 체포하고 수사했다는 점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간한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9권에도 기술돼 있다.

이 보고서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 권한이 없는 보안사 수사관들이 대상자들을 검거하여 불법 체포·감금을 한 사실"과 "중앙정보부 수사관 명의로 피의자 신문조서 및 압수조서, 검증조서 작성"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고발한다. 보안사가 수사한 사실을 감추고자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의 체포·수사가 불법인데도 1972년 당시의 보안사는 자신들이 이인국 등을 체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 시절 공안기관들이 국민들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위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보안사는 이인국 등이 "군 내부 침투, 거점을 확보"했다는 내용을 발표문에 담았다. 군 수사기관이 나설 법적 명분이 있었던 것처럼 발표문을 거짓으로 꾸몄던 것이다.

보안사의 수사는 그 외에도 법적 문제점이 많았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수사·재판 과정에서의 불법구금·진술강요·가혹행위" 등을 고발한다. 이인국을 끌고 간 수사관들이 사행(死行)어사, 저승사자가 되어 온갖 가혹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법정에서 이인국은 "보안사의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다"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외면했다.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등과 형법상의 간첩죄로 기소된 이인국은 체포된 다음 달인 1972년 2월 25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11월 28일 서울고등법원에서도 똑같은 형량을 받았다. 1973년 3월 13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이 형량을 확정했다.

보안사뿐 아니라 검찰·법원 모두 엉터리였다는 점은 이인국이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 열린 재심 재판정에서 확인된다. 2025년 2월 12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인국 재심 공판에서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대해 상고하지 않았다. 검찰은 처음부터 무죄 선고를 요청했다. 그래서 서울고법의 재심 선고는 그대로 확정됐다.

유죄판결이 이미 확정돼 있는 재심 사건이기 때문에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다. 일반 사건이었다면,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재판에 넘길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민간인 수사 권한도 없는 보안사가 그럴싸한 대형 간첩 사건으로 포장해 무고한 피해자들을 양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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