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다워" 97세까지 한국어 배운 일본 할아버지 사연

김슬옹 2026. 1. 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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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본에서 28년, 한국어 교육에 삶 바친 최수진씨

[김슬옹 기자]

 28년간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최수진
ⓒ 김슬옹
일본에서 28년간 한국어를 가르쳐 온 최수진씨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해, 지난 2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2024년 필자의 일본 한글학교 특강에서 최수진씨를 알게 되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한글가온길 답사를 함께 했다. 최씨는 결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잠시만 공부하고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곳에 정착하게 됐다. 자녀들이 모두 성인이 된 지금, 그는 일본에서 약 100명의 학생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한국어 교육 현장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류가 바꿔놓은 교실 풍경

한국어 교육 현장은 20년 사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 씨는 그 전환점을 또렷이 기억한다.

"2002년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겨울연가> 때부터 중년 여성의 학생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그 후 잠시 내림세인가 싶다가 제2, 제3의 한류 붐이 계속 불면서 다시 늘었고요. 최근에는 일본 어린아이들도 많이 배우려고 해요."

요즘 일본 초등학생들이 한글로 이름표를 달고 다닌다는 기사가 화제가 됐는데, 최씨도 쉽게 목격하는 현상이 됐다고 한다.

"가방에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쓴 아크릴 열쇠고리를 달고 다니는 경우도 흔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때문인지 수업중에 밖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한국말을 하며 노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예요."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 학생들은 대부분 한류 팬이다. 일본 젊은 세대에게 한글과 한국어 배우기는 일종의 '신선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97세 할아버지의 한국어 사랑

최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을 물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요시카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제 학생 중 97세 최고령자가 계셨어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까지 저한테 수업을 받으셨어요."

70대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이 할아버지가 배움을 결심한 계기는 뜻밖이었다. 일제강점기,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 갔다가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그때 들은 한국의 노랫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노랫소리를 계속 귀에 담고 기억하다가, 은퇴하고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항상 그 얘기를 하셨어요. '너무 아름다웠다'라고요."

일본인이 어려워하는 한국어 발음

일본인 학습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받침과 거센소리다.

"받침이 잘 안 돼요. 일본어 가나에는 받침이 'ん' 하나뿐이니까요. 일본어 'ん'(응) 발음은 뒤따르는 글자에 따라 [ㄴ], [ㅁ], [ㅇ] 또는 이들의 중간 소리로 변하는 받침 역할을 하는 비음이에요. 예를 들어, 'か(가)' 앞에서는 'ㅇ'에 가깝게, 'ぱ'(하) 앞에서는 'ㅁ'에 가깝게, 'な'(나) 앞에서는 'ㄴ'에 가깝게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신바시' 같은 일본어 단어로 ㅁ 받침을 설명하고, '강가에루(생각하다)'로 ㅇ 받침을 가르쳐요."

된소리보다 거센소리가 더 어렵단다.

"예를 들어 '치'라고 해야 하는데 '지'가 돼버려요. 숨을 세게 내쉬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거든요."

역사를 마주하는 교실

한국어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도 함께 다룬다. 한일 간 민감한 역사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고 물었다.

"기본적으로 저한테 배우러 오시는 분들은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오신 분들이라 굉장히 우호적이에요. 대신 근대사에 대해서는 쉽게 가르치기 어려워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학생들은 거부 반응보다 받아들이려 노력한다고 한다. 한국을 사랑해서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최씨는 일본에서 지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경험들도 많이 쌓아왔다. 20대 초반, 국제교류 프로그램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홈스테이 집의 한 어르신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일어나, 최씨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절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놀라서 저도 같이 절을 하며 '왜 그러시냐?'라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그분 개인의 마음으로, 과거의 역사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고 조용히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경험을 통해 그는, 정치나 국가 간의 갈등과는 별개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28년간의 일본 생활 속에서 최씨는 서로의 배경과 입장을 넘어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왔다.

연세대·서강대 교재부터 한국 역사책까지

최씨는 연세대·서강대 한국어 교재, 그리고 일본에서 자체 개발된 교재들을 활용해 수업을 한다. 현재는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펴낸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느낀 건,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문화와 역사를 함께 알아야 진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최수진씨는 고등학교, 사설학원, 문화센터, 개인지도까지 다양한 현장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대동강에서 들었던 한국의 소리를 잊지 못해 90대인데도 한국어를 배우는 할아버지, 가방에 한글 열쇠고리를 달고 다니는 한류 팬 학생들, 그가 만난 학생들의 이야기는 한류를 넘어 한국어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닿는지를 보여준다.
 97세로 운명하기 1주일 전까지 한국어를 최수진 씨에게서 배운 고 요시카와 씨의 생전 모습(일본 유족 공개 동의)
ⓒ 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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