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한 배우, 안성기의 특별함
[김성호 평론가]
내가 막 영화에 빠져들었던 시절, 한국 최고의 배우는 누가 뭐래도 안성기였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 배창호의 <고래사냥>,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에 주연하며 당대 최고 감독들의 대표작에 주연했다.
격동의 시대였다.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1987년 6월항쟁과 6공화국 출범, 그리고 문민정부 등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가 급물살을 탔다. 영화계도 다르지 않아 전에는 나오지 못할 만한 진보적이고 개혁적 색깔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지식인의 전유물로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 성향을 가졌던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화한 작품들이 변화의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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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
| ⓒ 시네마 서비스 |
그 시절 영화계는 보수적이었다. 왜 아닐까. 대중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쳐 선전선동의 도구로 여겨져 온 영화가 아닌가. 독재정권에서 검열은 일상적이었다. 시나리오와 완성된 필름을 먼저 수거해 내용을 삭제하고 폐기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 UCLA에서 유학하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동기였단 사실로도 유명한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30분 넘는 장면을 덜어내야 했다. 피해를 입은 영화사가 아예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사례는 차라리 일반적이라 해도 좋았다.
아예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국책영화가 쏟아진 것도 그래서였다. 반공, 또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작품들, 군인을 멋지게 보이게 하거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옹호하는 영화, 심지어 박정희나 전두환의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 수두룩하게 제작됐다. 그런 작품을 만드는, 또 그런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었으니 자연히 영화판 사람들도 그렇고 그런 색을 띄지 않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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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산맥 스틸컷 |
| ⓒ 태흥영화사 |
나와 같은 1980년대 할리우드 키드들에게 안성기는 변화하는 한국영화의 간판스타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민망한 표절작이란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우나 그래도 한국 영화사의 빼놓을 수 없는 성공작 <투캅스>의 첫 편에서 그는 주연으로 출연해 활약한다.
민망한 작품성의 똥망작이 되었으나 1998년 <퇴마록>의 출연은 기념비적이라 해도 좋다. 순문학이 아닌 장르문학, 기존 작법에서 벗어난 하위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선구적 시도에 동참하는 열린 자세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한국 영화사에 기록할 명작들에서도 분명한 존재감을 보였던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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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전쟁 스틸컷 |
| ⓒ 대일필림 |
바야흐로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규모로 성장한 한국영화가 중국, 일본과 합작하는 시도에서도 그의 존재감이 빛났다. <묵공>의 주인공 항엄중을 연기한 안성기는 무게감 있는 대작에서 언어를 초월해 철학과 가치의 무게를 진 장수를 연기할 이가 있음을 확인케 했다.
임권택과 오랜만에 재회한 안성기의 <화장>도 그 필모그래피에서 언급할 만한 작품이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무려 102번째 작품을 찍는 나이든 감독을 여전히 왕성한 현역으로 예우하게 한다. 나는 앞서 이 영화를 평하며 '이 영화가 가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연기' 때문'이라고 특별히 연기의 품격을 말한 바 있다. 본능에 가까운 욕망과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남자의 내면을 이 영화 속 안성기보다 더 훌륭히 소화할 배우를 떠올리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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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장 현장 사진 |
| ⓒ 리틀빅픽쳐스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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