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연금’인가 ‘정부의 지갑’인가…정치적 동원 가속화하는 ‘국민연금’
2025년 12월 24일, 외환당국의 초강력 구두 개입이 단행된 직후 외환 시장은 요동쳤다. 50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달러 매도 물량은 순식간에 환율을 30원 넘게 끌어내렸다. 시장이 지목한 주체는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이 전략적 환헤지를 가동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전략적 환헤지 기간을 1년 연장하고, 헤지 비율 확대도 논의 중인 국민연금은 정책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국민 노후를 책임져야 할 연금이 환율, 증시, 기업 경영까지 통제하는 ‘만능 해결사’로 동원되며 독립성 훼손 우려가 커졌다.

환율·주가·기업 감시까지 동원?
국민연금 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외환 시장 개입이다. 지난 2025년 12월 24일, 서울 외환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33.8원 급락한 1449.8원에 마감됐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이날 오전, 원화 약세가 과도하다는 취지의 강경한 구두 개입 메시지를 냈다. 시장에서는 이를 계기로 매수 포지션 청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시장에서는 구두 개입의 영향력만으로는 이례적인 단기 변동성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시장에서는 현물 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가 병행됐을 것이라고 봤다.
국내 주식 시장에서도 국민연금을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2025년 12월 16일, 이재명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보유 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국내 주가가 상승하면서 국민연금의 주식 보유 비중이 한도를 초과했는데, 이를 계속 팔아야 하느냐”며 “국내 증시가 잘 되는데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더 보유하면 그만큼 득이 되고 국민의 노후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며 국내 주식 투자 비중 확대를 주문했다. 이는 사실상 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 확대를 직접 지시한 것으로 해석되며, 연금 운용의 독립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역시 정부 요청에 따라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투자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업 의사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제도다. 이 대통령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국민연금의 기업 의사결정 참여 확대를 지시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편승한 국민연금
“정치 개입, 연금 신뢰 잃을 것”
국민연금 운용 방향도 대통령의 정책 기조와 연동하는 흐름을 보인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2025년 12월 15일 전략적 환헤지 기간을 2026년 말까지로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전략적 환헤지는 환율 급변 시 전체 해외 자산의 최대 10%(전술적 판단을 포함하면 최대 15%)까지 환율 변동 위험을 헤지(hedge)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2022년 도입 이후 매년 연장됐다. 아울러 현재 ‘14.9%±3%포인트’로 설정된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확대하기 위해 투자 지침을 변경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는 대통령의 국내 주식 확대 주문과 맞물려 연금의 자산 배분 전략에 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최근 청년 주거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국민연금을 활용해 청년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구상까지 밝히며 연금 자산의 정책 활용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충돌한다. 국민연금은 2025년 9월 말 기준 1360조20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운용 중이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해외자산도 798조원 규모, 국내 외환보유액인 620조원을 크게 웃돈다. 정부는 이런 국민연금의 영향력을 활용해 고환율, 증시 저평가, 자본 이탈 등 복합적인 경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정부 정책 목적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장은 연금을 더 이상 ‘독립적 플레이어’로 보지 않게 된다. 연금 운용 방향이 정부 정책 기조에 따라 흔들리게 되면 연금 수익률 역시 정책 변화에 종속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확대는 그 자체로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전략적 환헤지는 단기적으로 환율 변동성을 줄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국민연금이 얻을 수 있는 환차익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국민연금의 수익률 또한 낮아진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점차 정치적 목적에 따라 운용되는 현상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은 정부 자금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자산인 만큼, 그 운용 목표는 무엇보다 수익성 확보에 두어야 한다”며 “정치적 목적이 운용 전략에 우선하게 되면, 제도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공적연금인 GPIF가 정치적 입김으로 수익률을 올리지 못한 사례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까지 경제 안정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GPIF를 일본국채(JGB)와 국내 채권 중심으로 운용했는데, 오랜 기간 저수익 구조가 이어졌다.
공적연금의 독립성이 강화하면 수익률 상승은 따라온다. GPIF가 글로벌 투자기관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된 계기는 ‘아베노믹스’ 정책으로 연금 운용을 개혁하면서다. 당시 개혁으로 GPIF가 정부 산하 조직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강화하고, 자율적 포트폴리오 운영 권한을 확보하며 비로소 자산 다변화와 본격적인 해외투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일본 자본 시장 개혁의 성과 동인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배당 재투자를 고려한 총수익지수(TSR) 기준으로 2012년 말~2023년 말 동안 일본 주가지수는 297% 상승했다.
노르웨이의 국부펀드인 GPFG도 정치와의 철저한 분리를 원칙으로 삼는다. GPFG는 약 2400조원의 막대한 자산을 운용하면서도 “자산은 반드시 해외에서만 운용한다”는 기본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14년 저유가 쇼크 당시에도 예외는 없었다. 당시 노르웨이 정치권에서는 GPFG 자금을 동원해 자국 기업을 지원하고 인프라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압력이 거셌다. 하지만 GPFG 관리 주체인 노르웨이 은행(Norges Bank)은 단호했다. “펀드의 목적은 미래 세대를 위한 부의 축적이지, 현재 정권의 난관을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라며 정치적인 개입을 완강히 거부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역 출신인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전문성 있는 외부 위원 구성과 교차 임기를 도입하고 임기 보장과 높은 연봉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정권마다 정책 목적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구조가 반복되면, 젊은 세대는 연금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2호 (2026.01.07~01.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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