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그룹] 사라진 아버지의 비상금 봉투, 인사 목록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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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기자]
지난해 그믐날 아버지가 침대 매트리스 패드를 세탁해 달라고 했다. 패드 이곳저곳에 지저분한 자국이 있었다. 진작 봤다면 내가 세탁하자고 했을 터, 아버지에게 바로 세탁해 드리겠다고 했다.
패드를 걷어내지 매트리스 커버 위에는 편지 봉투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봉투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봉투는 오래돼 빛이 바랬고 찢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봉투가 왜 침대에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그 봉투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녁에 찾은 반전
걷어낸 패드를 세탁기 용기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세탁과 탈수를 모두 마치려면 반나절이 족히 걸릴 것이다. 새해를 맞아 아버지 침대 패드를 깨끗이 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다.
같은날 오후 경로당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침대에서 서성거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켜보니 침대 밑에 둔 봉투를 찾고 있었다. 이에 나는 패드를 치우면서 빈 봉투를 발견해 버렸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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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비상금은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
| ⓒ 이혁진 |
그런데 저녁때 반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이부자리를 정리하다 봉투를 찾았다며 슬며시 보여주었다. 문제의 봉투는 패드를 덮는 커버 밑에 있었던 것이다. 봉투를 찾은 아버지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반갑지만 나도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도로 찾은 기분이었다. 돈봉투는 제법 두툼해 보였다. 그러나 그 금액과 용도를 여쭈지 않았다.
아버지는 돈봉투를 오랫동안 비상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만약 그게 정말 없어졌다면 얼마나 허탈했을까 생각하니 아버지가 측은해 보였다.
만일에 대비하는 돈, 비상금이 소중한 이유
고백하건대 나도 비상금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아버지보다 더 심한 건망증을 겪었다. 몇 년 전 책갈피에 비상금을 숨겨두었는데 그 책을 버린 것이다. 나중에 책을 기억해 냈지만 새까맣게 잊었다. 문제는 비상금 등 소중한 물건을 둔 곳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세상에 감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내가 애타는 아버지를 보면서 무어라 탓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해결 방법은 비상금을 보관하는 곳을 자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깜빡 잊는 증세 때문에 아내에게 숨긴 곳을 알려줄까 고민한 적도 있다. 비상금의 매력은 액수를 떠나 만일에 대비하는 돈이다. 보관하는 방법이 다를 뿐 비상금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모른 척하는 비밀이다. 은퇴 이후 고령일수록 비상금은 더 소중하다.
아버지는 용돈을 쪼개 비상금을 마련했을 것이다. 모으기는 힘들어도 비상금의 용도는 다양할 것이다. 내 경우 대부분 경조사 비용에 충당하는 데 반해 아버지는 애들 세뱃돈이나 나와 아내의 생일날 주는 돈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아버지 비상금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가족 간 정서를 교감하는 수단인 셈이다. 다행히 숨겨둔 비상금 봉투를 찾았다. 연말연시 액땜 치고는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해서 새해를 맞아 새로운 질문 하나를 추가했다. 아버지께 가끔 "비상금은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상금을 관리하는 아버지에게 다소 도움이 될 듯싶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아버지 비상금을 따로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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