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고객 우대하니 하나銀 수신 5조 늘어…불황 뚫는 ‘로열티의 경제학’ [경영전략노트]
잡은 고기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이 격언이 경영 현장에서 폐기처분되고 있다. 저성장과 고물가가 겹친 복합 위기 속에서 각 기업이 신규 고객 확보(Acquisition)보다 기존 고객 유지(Retention)에 사활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집토끼 지키기’ 차원을 넘어선다. 장기 거래 고객을 우대하는 것이 기업 재무적 성과를 비약적으로 개선한다는 사실이 데이터로 입증되고 있어서다.

이호성 하나은행장 실험 통했다
서울 시내에서 20년 넘게 음식점을 운영해온 김 모 씨는 최근 스마트폰을 확인하다가 눈을 의심했다. 거래 은행장 명의로 온 장문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단순히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성 문자가 아니었다. 지난 15년간 한결같이 거래해줘서 고맙다는 진심 어린 인사와 함께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씨는 “거래 지점장 얼굴 정도나 알지 은행장이 내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큰돈을 예치한 자산가도 아닌데 그동안의 의리를 인정받은 것 같아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만기가 돌아온 타 은행 예금을 해지하고 이 은행으로 옮겼다.
이는 하나은행이 지난해부터 가동한 장기 거래 손님 우대 프로그램 하나더퍼스트(HANA THE FIRST)가 만들어낸 실제 풍경이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취임한 이호성 은행장의 강력한 의지로 10년 이상 거래한 손님 502만명을 하나더퍼스트 대상으로 선정했다.
주목할 점은 선별 기준의 변화다. 그간 금융권의 VIP 기준은 철저히 돈이었다. 수신고가 얼마인지, 대출이자가 얼마인지 따지는 정량적 핵심성과지표(KPI)가 고객 등급을 갈랐다. 하지만 하나은행은 시간과 신뢰라는 정성적 가치를 최우선에 뒀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은행 내부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연말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하나더퍼스트 손님 유지율은 99.7%를 기록했다. 사실상 이탈이 제로(0)에 가까운 수치다. 더 눈길 끄는 건 재무 성과다. 이 기간 해당 고객들이 하나은행에 추가로 예치한 수신 규모는 전년 대비 5조2000억원이나 늘어났다.
이호성 은행장은 “손님을 돈으로 보지 않고 파트너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금융의 가치가 창출된다”는 평소 철학을 현장에 구현했다. 영업점 모니터에 장기 고객이 방문했다는 알림이 뜨면 창구 직원부터 지점장까지 모두가 일어나 맞이 인사를 건네는 문화, 생일 축하 쿠폰과 은행장의 자필 편지 등은 디지털 금융 시대에 실종됐던 인간적 유대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객 유지율 5% 상승
이익 95% 올린다
하나은행의 이런 성과는 경영학적으로 뒷받침된다. 학계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고객 생애 가치(Customer Lifetime Value, CLV)와 리텐션 마케팅의 중요성을 설파해왔다. 고객 충성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프레데릭 라이헬트(Frederick F. Reichheld) 베인앤드컴퍼니 펠로우는 199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기고한 ‘결함 없는 이탈: 서비스의 질(Zero Defections: Quality Comes to Services)’에서 “고객 유지율을 5%만 개선해도 기업의 이익은 업종에 따라 최소 25%에서 최대 95%까지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라이헬트의 분석에 따르면, 장기 고객이 기업 수익에 기여하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신규 고객 유치 비용이 들지 않는다. 둘째, 거래 기간이 길어질수록 고객의 지출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셋째, 기업에 대한 신뢰가 쌓여 가격 프리미엄을 수용하거나 운영 비용을 낮춰준다. 넷째, 주변 지인에게 기업을 추천하는 무료 마케터 역할을 한다.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 노스웨스턴대 석좌교수 역시 그의 저서 마케팅 관리론에서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기존 고객을 유지하는 비용보다 약 5배에서 7배 더 든다”고 지적했다.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된 지금, 기업 입장에서 집토끼 단속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인 셈이다.

장기 고객 잡기 경쟁
고객 붙들기 전쟁은 금융권을 넘어 산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구독 경제의 원조 격인 렌털 업계 1위 코웨이는 최근 재렌털 고객 우대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했다. 약정 기간이 끝난 고객이 신제품으로 교체할 경우 1년간 렌털료를 20% 할인해주는 혜택이 대표적이다. 신규 고객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영업 사원에게 지급해야 하는 수수료와 마케팅 비용을 고려하면, 기존 고객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편이 수익성 면에서 훨씬 낫다는 판단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라이헬트의 이론과 부합한다.
퇴직연금 시장의 격전도 결국은 장기 고객 확보 싸움이다. 퇴직연금은 한번 가입하면 퇴직할 때까지 수십 년간 계좌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초장기 상품이다. 최근 은행권이 증권사로의 머니무브를 막기 위해 IRP 수수료를 전액 면제하고, 로보어드바이저 등 첨단 자산관리 서비스를 도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연금리더 제도를 통해 각 영업점에 퇴직연금 전문 인력을 배치했고, 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도 장기 가입 고객을 위한 이벤트를 쏟아내고 있다. 당장의 수수료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20년, 30년 함께할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미래의 생존을 담보한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결과다.
장기 고객 우대 핵심은 진정성
숫자를 이기는 유일한 무기
경영 환경이 어려워질수록 기업들은 비용 절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불황일수록 고객 관계 관리(CRM)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과거의 고객 관리가 마일리지 적립이나 사은품 증정 같은 ‘거래 혜택(Transactional Benefit)’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정서적 유대감(Emotional Bonding)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나은행의 사례에서 보듯, 고객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기업에 지갑을 연다. 서울은행 시절부터 평생을 거래해온 B씨가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서 가족 같은 정을 느끼고, 20대부터 거래해온 자영업자가 은행장의 문자에 감동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가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증명했듯, 금융의 본질은 신뢰와 관계에 있다. 그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담보 없이 대출을 해주면서도 99%에 가까운 상환율을 기록했다. 고객을 믿고 우대했을 때 고객 역시 기업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진리는 방글라데시의 시골 마을이나 서울의 첨단 빌딩 숲이나 다르지 않다.
앞으로 기업의 성패는 팬덤(Fandom)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라, 기업의 철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단골손님을 만들어야 한다. 10년 넘은 단골을 VIP로 재정의한 하나은행의 실험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1호 (2026.01.01~01.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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