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커 전에 이들이 있었다... 한국 게임의 기원 기록한 '세이브 더 게임'

김상목 2025. 12. 3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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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세이브 더 게임>

[김상목 기자]

 <세이브 더 게임> 스틸
ⓒ ㈜바른손이앤에이
한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대부분 학부모가 현대판 '호환', '마마'처럼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다. 공부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자녀가 빠져 사는 '게임'이다. 제발 내 자식은 게임에 몰두할 시간에 영어 단어 한 자라도 더 외우길 바라는 부모의 간절함과 달리, 게임은 이제 또 다른 현실이자 아이들에겐 독자적인 세계로 자리한 상태다.

이제는 사회적 인식도 제법 변하긴 했다. '3N'이라 불리는 대형 게임 제작사는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한국판 '소프트밸리' 모델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게이머 대명사 '페이커'는 내 자식 기왕 '게임 폐인' 구제 불능 지경이라면 차라리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신화적 존재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일어난 천지창조 급의 변화다.

그렇다면 이런 온라인 게임 전성시대의 시작은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인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통 잡히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한국 게임의 기원부터 흥망성쇠를 기록한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가슴 진정할 필요 없이 작품을 향해 직진하자.

'태초'에 패키지 게임이 있었더라
 <세이브 더 게임> 스틸
ⓒ ㈜바른손이앤에이
굶주림과 빈곤을 벗어나 '잘살아보세!' 구호로 온 나라를 획일화하던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절대빈곤을 벗어난 한국 사회는 경제적 여력과 시민의 자유란 조건이 갖춰지며 1987년 제도적 민주화 정착과 함께 봇물 터지듯 무한 확장을 개시한다. 문화산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거대한 수면 아래 변화 중에 게임이 있었다.

그저 산업화에 매진하던 시절 서울 랜드마크로 세워진 세운상가는 초창기 게임 문화의 상징으로 변신한다. 왜 모 시인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집필했고, 현대 건축유산으로 재개발을 반대하는 숱한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존재하는지 비밀은 그로부터 기인하는 셈이다. 용산전자상가처럼 게임을 향한 모든 길이 세운상가 으슥한 내부로 향한다. 그곳에는 불법 복제된 일본 콘솔 게임 패키지를 구할 수 있었고, 게임이 고픈 청소년은 그곳에서 비밀스런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다. 그들이 그저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직접 게임을 구현하려던 시도가 1987년 한국 최초의 게임 '신검의 전설'로 탄생한다. '호모 비디오쿠스'의 도래다.

몇 년이 지났다. 교육용으로 16비트 컴퓨터가 공공기관에 보급되며 국산 게임 개발도 가속된다.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이 등장하고 기술 발전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치열해진 경쟁은 자연스레 질적 향상으로 연결된다. 게임 음악이 창작되고, (당시로는) 첨단 미디 사운드가 도입된다. 1994년엔 대기업이 게임 유통에 눈을 돌리고, 전국적으로 광역시 급에선 지역을 대표하는 유통 및 제작업체가 형성된다. PC통신 문화가 널리 보급된 컴퓨터 덕분에 퍼지며 상업적인 시장이 순식간에 확산된다. 10만 장이 판매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저작권 보호 개념 자체가 미비하던 국내에선 (만국 공통) 불법 복제와의 이길 수 없는 전쟁도 불이 붙는다.

그렇게 물적 토대가 축적되자 게임업계로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밀려든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교내 고 사양 컴퓨터와 서버 전산망은 그 젖줄이자 혈관이 되었다. 자식 공부시켜 명문대 보내놨더니 게임에 미쳐 식음 전폐한다는 아우성이 터졌다. 그들이 청춘을 바쳐 유희와 성공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희비를 가른다. 1990년 전후 출발한 특정 세대가 오늘날 전성기를 구가하는 한국 게임의 시조새가 된다. 게임 이용자라면 애증의 대상일 '네임드' 거물들이 연달아 회고담을 전한다. 한국판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가 속속 등장한다. 짧은 시간에 게임 품질도 급격하게 진화하며 누구나 이름 들어봤을 명품 게임이 전성기를 구가한다.

현대사 변화와 부침을 함께 하는 게임문화를 반추

온갖 시행착오 속에도 팽창을 거듭하던 한국 게임 산업과 문화는 오프라인-현실 세계의 변화와 동떨어질 수 없었다. 게임에 탐닉하던 이들은 현실의 온갖 피로를 게임으로 잊고자 했을 테지만, 바로 그 게임 역시 실제 세상의 변화에 직접 연결되어 있던 탓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분기점, 1997년 IIMF 구제금융 사태가 바로 그 결정적 순간으로 작동한다.

IMF 금융지배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신성장동력을 구축하고 싶던 당시 한국 정부는 신지식인으로 전통적 명문대 엘리트 코스를 벗어난 성공 사례를 홍보하고, 당시 미국 중심으로 가파르게 전환되던 IT 산업 활성화에 집중한다. '정보 초고속도로'라는 미국 신산업 구호를 가져와 1998년부터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사활을 기울인다. 그 결과 가정용 컴퓨터 이용환경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피시방'이 전국 각지에 들어선다. 이 네트워크 안정화는 한국 게임 산업에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급기야 2001년을 기점 삼아 패키지 게임을 추월한 온라인 게임은 '리니지' 같은 초인기 게임과 함께 현재까지 계속되는 전성기를 열어젖힌다. 초창기 창의력과 도전정신에 이어 대규모 서버 관리와 안정화가 게임산업 흥망에서 결정적 요소가 된 것이다. 자연히 고도로 전문화된 엘리트 개발자 집단이 구성되고, 그들이 자신을 갈아대며 일론 머스크나 마크 저커버그의 창업기를 연상케 하는 온갖 일화를 만든다. 대기업 연공서열 직장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그러나 노동인권과는 동떨어진 기업문화의 탄생이 곁들어진다.

게임산업, 자신들의 창세기를 역사로 남기다
 <세이브 더 게임> 스틸
ⓒ ㈜바른손이앤에이
2000년 전후로 스타트업 활성화와 대기업 투자 및 상장이 어우러지며 게임업계는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한다. 한국 게임의 판도가 뒤집히던 시절, 초창기 개척자로 활약하던 게임 업체들은 '라스트 댄스'를 선보이지만, 결국엔 '번들'이라 불리는 부록 끼워팔기 벽을 넘지 못한다. 공들인 대작 게임이 1만 장 팔릴 때, 10배 이상 불법복제가 탄생하는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란 역부족이던 탓이디. 그렇게 한 시대가 저문다. 영화는 그 격동의 시대, 하지만 이제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를 애정과 연민, 그리고 치열한 고증을 곁들여 조명한다.

이런 작업을 수행하려면 전통적인 기록영화 작업만으로 접근할 수 없다. 자신이 담고자 하는 상대에 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필수다. 그렇다면 최적화된 제작진의 존재가 1차 난제다. 다행히 영화는 최상의 궁합으로 출발한다. 한때 인기를 끌었으나 이젠 제작사도 업그레이드는 물론, 서버 관리조차 손을 놓은 RPG 게임 '일렌시아' 몇 남지 않은 잔존 이용자를 찾아 전국을 여행하며 그들이 왜 철 지난 데다 '버그' 투성이 게임을 떠나지 못하는가 탐구한, 본인부터 해당 게임의 '헤비 유저'인 박윤진 감독이 그 중책을 자임한다. 그 기행은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라는 다큐멘터리로 개봉에 이른다. 감독의 게임 아이디가 바로 '내언니전지현'이다.

게임 이용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들만이 공유하는 소우주를 나누고, 게임이 그저 시간 죽이기로 그치지 않는 어떤 원체험이자, 사방이 가로막힌 벽과 같은 현실을 극복하거나 위로하는 순기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산업과 이윤에 국한되지 않고, 자체로 시대정신과 문화를 구축하는 게임이란 존재에 관해 공개적으로 개봉한 최초의 작업은 흥행 성적과 별개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며 거대 산업이 되었지만, 갈등과 분열이 일상화된 업계 내에서도 화두가 된다. 작품 속에서 질타와 비판의 대상으로 포화를 맞던 게임 제작사가 자성의 움직임과 더불어 ESG 경영 흐름에 활용하고자 TF를 구성해 손을 내민다. 30년이 훌쩍 넘은 기업 역사를 돌아보며 게임 흥망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제안한 덕분에 <세이브 더 게임>이 탄생한다.

장대한 3부작의 출발이자 잊힌 보물창고와 같은 작업

넥슨의 지원으로 탄생한 <세이브 더 게임>은 1편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게임의 탄생과 초창기 흥망사를 담은 1부 성격인 본 작업에 이어 2000년대 온라인 게임 전성시대와 함께 벌어진 '화양연화'를 회고하고, 대중화한 게임의 사회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 더 라인>이 2부, 게임 제작사와 개발자의 반대편에 선 게이머들의 탄생과 활약에 대한 3부 <굿게임(GG), 한국의 게이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연달아 완성되었다.

게임 애호가들에게 애증 대상인 굴지의 대기업이 자신들의 기원과 변천사를 다룬 기록물에 투자하면서 개별 기업 자화자찬에만 기울지 않는 창작자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작업을 완성했다는 건 유의미한 변화다. 물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아쉬움이 남을 수 있지만, 소싯적 게임에 빠져 청춘을 보내본 중장년이라면 <세이브 더 게임> 3부작은 추억의 일기장이나 사진첩을 우연히 이삿짐 꾸리다 발견하고 감회에 젖는 체험 마냥 다가올 테다.

업계 위주의 수치와 업적 홍보로 그치지 않고, 게임 애호가의 시각으로 제작진 역시 청춘의 일부분으로 간직하던 게임을 역사이자 문화로 탐구하는 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정치나 전쟁 같은 거대 역사가 아닌, 일상에 새롭게 진입해 어느새 문화로 자리한 대상을 생활사로 풀어내고자 하는 도전은 근래 한국 대중문화와 사회 탐구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복고(RETRO)' 열풍을 단순한 상술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 주제로 삼는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

처음엔 그저 '그땐 그랬지' 추억팔이로 그만일 뿐 같지만, 보고 있자면 개인의 회고를 초과해 사회변화가 물밑에서부터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장구한 과정과 함께 사회가 어떻게 정교한 순환을 거쳐 변모하는지, 마치 <아바타> 속 배경인 판도라 행성의 순환과 자정 작용을 주관하는 '에이와'처럼 작동하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1부에서 감회에 젖었다면, 2부와 3부로 망설이지 않고 좌표를 잡으면 된다.

<작품정보>

세이브 더 게임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5. 12. 29. 공개(넷플릭스)|80분|전체관람가
감독 박윤진|PD 이원일
기획 / 제작 ㈜사이드미러
제공 재단법인 넥슨재단
배급 ㈜바른손이앤에이
 <세이브 더 게임> 포스터
ⓒ ㈜바른손이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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