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

손소희 2025. 12. 3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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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집 <회로를 이탈하다>를 읽고

[손소희 기자]

2024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의 사연을 기록하는' 반올림 기록팀을 모집했었다. 먼발치에서 반올림 활동을 응원하고 있던 나는 반올림 활동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어 2025년 초 참여했었다.
▲ 회로를 이탈하다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 열다섯 분의 구술기록집
ⓒ 반올림
그러나 산재 피해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 지난 5월경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의 말과 삶과 꿈을 실은 책 <회로를 이탈하다>(2025년 10월 출간)를 만났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김우, 심지안, 유지영, 이하늬, 임다윤, 차성덕 여섯 분의 기록자가 열다섯 분의 구술자를 만나 '말하는 소리가 작으면 듣는 귀가 커야 한다'라는 명언을 실천해 낸 귀한 책이다.

열아홉 살 딸이 삼성에 입사했다고 기뻐하셨던 부모님은 일 년 만에 딸의 손 마디 마디에 박힌 굳은살과 변형된 손가락을 보고는 눈물을 보이셨다. (278쪽)

2011년 삼성 기흥공장에 입사한 우하경 씨의 손가락도 다른 삼성반도체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손가락처럼 무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도만 되어도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그다지 심각한 축에 끼지 않는다. 손가락이 휘어졌다고 일을 못 할 지경도 아니었다. 손가락이 휘어진 걸 이상하다고 의심하게 된 건 더 큰 병이 찾아왔을 때였다.
"삼성 기흥공장 3라인 LED 공정은... 교대근무가 기본이고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했어요. 모듈 할 때는 엑스레이 장비 옆에서 일했고, 자동배합기가 있긴 해도 바빠서 손으로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배합할 때 형광체, 경화제 같은 걸 섞거든요. 그거 다 유해한 거잖아요. 장갑에 구멍이 날 때도 있었고, 손에 물질이 묻을 때도 많았어요. 솔더크림도 사용했어요."(17쪽 이선주)

"공기 순환 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고, 에폭시나 형광물질, 암모니아 케미컬(화학물질)을 진짜 많이 썼어요." (30쪽 김지우)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이선주씨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최형인씨는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김지우씨는 자녀가 산재 피해를 보았다. 정향숙씨는 100만 명 중의 한 명 나타난다는 거대세포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 이들은 자신 또는 자기 자녀가 아픈 이유에 대해 숱한 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다. 자신이 공장에서 노동했던 과정을 복기해 아픈 원인을 찾았다.

일과 학습 병행제도에 매력을 느껴 구미공단에 있는 삼성 하청 케이엠텍에 입사한 이승환씨는 급성백혈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이스터고 현장실습으로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취업한 김선우씨는 일한 지 1년 만에 간이식을 할 정도로 생사를 넘나드는 큰 병을 앓게 된다. 서울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이가영씨는 림프종을 앓다 사망했고, SK하이닉스 이천공장 기술연구소 분석실에서 28년 근무한 최상미씨도 뇌종양이 발병해 사망했다.

이들이 산재를 신청하면 해당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시간을 끌었다. 공단의 '부실한 역학조사와 역학조사 장기화'로 피해자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정부 기관이 피해자의 치료와 회복을 우선하지 않는 현실에서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이 선택한 건 대기업 삼성과 SK하이닉스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바위에 달걀 치기가 될지라도 달걀 자국을 남기고 싶어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반도체 노동자들이 아픈 이유를 개인의 문제라고 덮어버렸다면 삼성, SK하이닉스, 반도체, 전자산업, 유해 물질, 위험의 외주화, 현장실습이라는 키워드와 연결 짓지 못했을 거다. 이미 삼성 반도체에서 백혈병 또는 뇌종양 같은 암이 발병해 죽어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故 황유미 씨이고 故 황민웅 씨가 그랬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11년을 싸웠다. 싸우는 유가족과 당사자의 곁에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있었기에 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은 자신의 병이 삼성 또는 반도체 산업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다.

또 책에는 박만수씨가 삼성코닝 정규직 시절, 노조를 만들려 했던 시도도 살짝 보여준다. 책에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지난 세월 동안 삼성에는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가 숱하게 있었다. 그렇게 삼성의 무노조 신화라는 알을 깨고 나온 노동자가 바로 임휘준씨와 같은 조합원이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깨고 나온 이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실 나는 몇 달 전부터 반도체 노동 문제를 다루는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책 모임을 하게 된 이유는 반올림 기록팀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내가 반올림 기록팀을 나오고 얼마 뒤 삼성에서 거대한 노동조합이 출범했었다. 내부 민주주의 문제가 발생했다.

임단협 교섭이 타결될 즈음에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집행부가 삼성 자본과 임단협 교섭 중 대의원과 조합원에게 알리지 않고 전임자 처우를 별도 합의했다. 이 밀실 합의는 문제가 되었다. 용기를 낸 조합원 우하경씨와 몇 사람이 노조에 문제를 제기하자, 오히려 징계를 당했다. 물론 징계는 무효 판결을 받았고, 문제가 된 집행부는 얼마 뒤 사퇴했다. 이후 노동조합이 과연 삼성이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지가 나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절정의 순간은 우하경씨와 동료들이 노조에 문제를 제기한 이후 집행부가 총사퇴를 하고 노조 임원 선거를 다시 하게 되었을 때였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전국삼성전자노조 조합원들이 우하경 씨와 동료들이 정당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인정하듯이 표를 던졌다.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가 현실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우하경씨가 노조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나는 언젠가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담대해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지금 반도체 전자산업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생산하는 전자칩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전자칩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는 인간은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구술기록집 <회로를 이탈하다> 책이 그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책을 덮고 한참 동안 상념에 젖어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이야기인데 왜 이스라엘로부터 하루가 멀다고 폭격당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들이 생각났을까? 인공지능을 장착한 드론을 띄워 팔레스타인 민중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지금 일상에서 편리하게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기술의 발전이 이룩한 꿈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스라엘이 무자비하게 팔레스타인을 향해 폭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브지(5G)의 속도는 인간이 편리하게 살기위해 필요한 속도가 아니었다. 자본가가 더 큰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성능 좋은 전쟁 무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군사기술이다. 이런 군사기술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쟁광들이 힘 없고 가난한 민중을 학살하듯이 반도체 전자칩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목숨도 위협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회로를 이탈하다'라는 문장의 주어가 노동자였으면 좋겠다.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노동자를 병들고 죽게 만든다면 노동자는 정해진 회로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올림 기록팀이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옮겨 <회로를 이탈하다>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에서 드러난 피해자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야 할까? 반도체 노동환경과 직업병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는 게 정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을 규제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해 노동자가 일터에서 병들고 죽지 않게 만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래서 <회로를 이탈하다>는 정치를 돕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이 대중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직업병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이들이 반도체 노동환경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개선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반도체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반도체 특별법 같은 재벌만 살찌우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결정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 아닌가 말이다.
반올림 기록집 <회로를 이탈하다> 신청하는 법
반올림은 지난 1년간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노동자의 삶에 충실한 기록을 남기고자 애써왔습니다. 피해자들을 다시 찾아 이들의 꿈, 가족, 일, 아픔에 대해 물었습니다. 비로소 15명의 생애사를 담은 기록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술자들과 기록자들의 노고가 담긴 기록집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주문서를 작성해주세요.

기록집 신청: https://forms.gle/7H89X4zLoMXWS6pW9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프레시안에도 실립니다. 필자소개 : 소희 <파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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