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국무부, 韓정통망법 저격 "검열권 우려…기술협력 위협"

박현주 2025. 12. 3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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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해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해 미국이 "기술협력을 위협한다"며 당국에 "검열권"을 부여하는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미국이 동맹국의 국내 입법 절차를 거쳐 처리된 사안에 대해 즉각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것은 이례적으로 볼 수 있다. 해당 법에서 규정한 '허위·조작 정보'에 대한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거나 자의적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라 로저스 미 국무부 공공외교 차관이 30일 국무회의 통과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대해 30일(현지시간) 엑스를 통해 입장을 표명했다. 엑스 캡처.


사라 로저스 미 국무부 공공외교 차관은 30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한국의 네트워크법(Network Act)은 표면적으로는 명예를 훼손하는 딥페이크를 바로잡는 데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기술 협력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트워크법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을 뜻한다.

로저스 차관은 또 "딥페이크는 당연히 우려스러운 문제이지만, 규제 당국에 주관적 검열 권한(viewpoint-based censorship)을 부여하기보다는 피해자에게 민사적 구제책을 제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한국의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에 대해 미국 정부가 입장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허위조작 근절법은 불법이나 허위조작 정보라는 걸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이를 유포할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를 배상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또한 대규모 플랫폼 사업자가 불법·허위·조작 정보에 대해 삭제, 접근 제한, 계정 정지, 수익화 제한, 서비스 중단 등 다양한 자율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해당 법은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가 허위'이거나 '내용을 사실로 오인하도록 변형된' 정보를 각기 허위 및 조작 정보로 규정했다. 이에 허위조작정보를 가려내는 근거가 모호하고 사실상 정부나 관련 기관이 이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는데, 국무부 역시 이를 규제 당국에 대한 "검열권한 부여"로 본 셈이다.

이번 입장 표명은 미국이 지난 23일 표현의 자유 제약을 문제삼아 미국의 빅테크 규제 입법을 주도한 유럽연합(EU)의 전 고위직 등 5명의 입국을 금지한 조치와 맞물려 주목된다. 관련 조치를 총괄한 인물이 바로 허위조작근절법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힌 로저스 차관이기도 하다.

미국은 그간 2022년 EU가 제정한 디지털서비스법(DSA)을 문제 삼아왔다. 플랫폼 기업이 온라인상의 불법 콘텐츠와 혐오 발언, 허위 정보 등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과징금을 부과하는 게 해당 법의 골자다. 입국 금지 조치도 해당 법 제정에 관여한 인물들에 대해 이뤄졌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들은 미국 온라인 플랫폼 기업을 검열하고, 수익 창출을 제한하는 등 조직적 압박을 가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와 관련, 여당 주도로 처리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도 미국의 온라인 플랫폼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해당 법 개정안 원안은 입법 이유에서 직접 DSA를 모델로 언급하며 "거대 플랫폼 사업자에 일정한 법적 의무를 부과해 사업자가 불법정보와 허위정보에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 입법은 플랫폼 규제 등을 통해 자국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조치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최근 미국의 기조와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유튜브, 엑스, 구글 등 미국 플랫폼 기업들이 이 법을 근거로 한국에서 특정 콘텐트를 제재해야 하는 압박에 놓일 경우 미국 기업의 활동을 옥죄는 결과로 이어질 거란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이외에도 법안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산하에 ‘투명성 센터’를 두고 사실확인을 지원하도록 했는데 이에 대해 야당에선 "어용 감시기구"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런 우려는 워싱턴 조야에서 공감하는 분위기다.

워싱턴 내 대표적인 지한파 학자인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이날 중앙일보의 관련 질의에 "한·미 팩트시트의 문구와 취지는 입법과 규제를 시장 보호주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점에 분명한 초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공개된 한·미 정상회담 결과물인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는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서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차 석좌의 입장은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이 한·미 팩트시트의 정신과 충돌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엔도 한국의 허위조작정보 근절법과 관련해 국내 단체가 제출한 진정서를 검토 중이다. 류제화 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자유와 인권을 위한 워킹그룹(가칭)’은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등에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긴급 탄원(urgent appeal)’ 발송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최근 전달했으며 유엔 측은 “사안을 인지하고 있으며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회신했다.

특별보고관들이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 정부에 공식 서한을 보낼 수 있다. 앞서 2021년 언론중재법 개정 논란 당시에도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한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고, 이후 국내외 비판 등을 감안해 민주당이 개정안을 철회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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