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먹어도 좋아, '전설' 고다르가 1959년에 꿈꾼 '새로운 영화'

김상목 2025. 12. 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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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누벨바그>

[김상목 기자]

 <누벨바그> 스틸
ⓒ 오드(AUD)
1959년 파리, 프랑스 영화계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벗어나 다시 번성하고 있었다. 기성 영화계에 반기를 든 일군의 신진 평론가 그룹은 훗날 '누벨바그(뉴웨이브)'라 불리게 될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며 창작자로 속속 전향하던 참이다. 동료였던 프랑수아 트뤼포와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시작하자 여기에 자극을 받은 장 뤽 고다르도 '최고의 비평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며 영화 작업을 결심한다.

< 400번의 구타 >로 평단의 찬사를 받은 트뤼포의 원안과 샤브롤의 자문역 덕분에 제작사의 투자를 받게 된 고다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린 날카로운 비평 입장을 이미지로 구현하고자 파격적 도전에 임한다. 자신과 단편을 함께 했던 신인 배우 장 폴 벨몽도에게 언젠가 약속한대로 장편을 함께 하기로 정했으니 남자 주인공 '미셸'은 해결했다. 그와 합을 맞출 '파트리시아'가 문제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진 세버그가 결혼과 함께 파리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온갖 수를 다 써 그녀를 포섭한 감독은 이제 자신이 꿈꾸던 '드림팀'을 구성하고 20일간으로 예정한 촬영에 본격 돌입한다. 하지만 현장은 순항과는 정반대다. 어떤 날은 한 컷도 찍지 않고 치통이 심하다며, 배탈이 났다며 중단한다. 대본도 당일 아침에 구두나 쪽지로 전해질 따름이다. 배우들은 다음 장면이 무엇일지 종잡을 수 없고, 제작자는 계획과 어긋난 일정 진행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감독은 확신에 차 있다. '새로운 영화'가 탄생할 것이라며.

박제가 된 고다르, 우상을 파괴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
 <누벨바그> 스틸
ⓒ 오드(AUD)
2022년,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한 장 뤽 고다르의 이름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전설'이 되었다. 정작 고다르가 선보인 작업 대부분, 특히 인생 중후반기의 것들은 제대로 소화한 이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외따로 돌출한 높이 솟은 거대한 봉우리처럼 고다르 이름 세 글자는 대체 불가능한 대중문화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아이콘'이란 표현의 기원이 성경 속 신고 성인을 그린 성화라는 점에서, 고다르란 존재는 현대 영화의 신(들) 일원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그런 고다르의 장대한 영화 여정을 소재로 삼고픈 유혹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좋고 싫음 분명한 꼬장꼬장한 성질머리에 90살 넘게 생존한 고다르의 일대기 전기물에 도전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고다르가 지닌 거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그에 도전한 작업은 드물다.

영화감독으로서 고다르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는 제법 되긴 하지만, 아마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부류라면 2017년,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이 연출한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를 들 수 있겠다. 1960년대 후반, 고다르가 <중국 여인>을 촬영하던 시절을 옮긴 해당 작품에 관해 생전 고다르는 '멍청한 짓'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언급하고 지나쳤다. 이젠 자연스레 누구라도 쉽게 도전하지 못할 건 명확하다.

하지만 <비포 선라이즈>로 주목받고, <보이후드>로 거장이라 불리는 데 이론이 없게 된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재차 감행한다. 그것도 심지어 고다르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 제작기다. 링클레이터다운 야심 넘치는 도전이지만, 그만큼 고난도 과제다. 영화가 완성되기 한참 전부터 영화 애호가들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가 절로 터질 지경이다. 그리고 고다르 사후 3년 지난 2025년에 드디어 <누벨바그>가 세상에 공개된다.

예고된 바 대로 이 새로운 고다르 전기물은 하지만 정석적인 위인전 형태로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 의도였다면, 충실하고 꼼꼼한 다큐멘터리로 족했을 테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굳이 실사 영화로, 하지만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결로 극한의 재현을 도모한다. 요즘 극장에서 상영하는 작품의 표준 화면 비율 1.85:1 대신에 원본이 되는 <네 멋대로 해라>처럼 4:3(1.37:1) 비례를 고수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흑백 화면을 구현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자면 마치 블루레이 디스크에 영화 본편과 별도로 수록되는 부가 영상 중 제작 과정을 기록하는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굳이 극영화로 제작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응답하라 누벨바그! 세계를 뒤흔든 새로운 영화의 해일
 <누벨바그> 스틸
ⓒ 오드(AUD)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올 지경이다. 영화 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된 걸작의 제작 과정과 누벨바그 사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들이 속속 화면에 정신없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과 인물들의 면면이 등장할 때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필사적으로 뇌세포를 더듬으며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글자로만 읽었거나 어렴풋이 흐릿하게 남은 인명과 해설을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건 가혹한 부담일 뿐이다.

깔끔하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 아니 발상을 전환하기로 한다. 그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의 리듬감에 몸과 머리를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이다. 그러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쉴 새 없이 키득키득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마치 작중 고다르와 영화의 친구들이 근심 걱정 태산인 제작자만 제외하고 함께 실실 유쾌하게 웃으며 작업에 임하던 것처럼.

무엇보다 시각적 황홀경을 제공하는 건 영화의 만신전에 오른 숱한 이름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화면에 강림하듯 속속 연달아 출현한다. <네 멋대로 해라> 촬영 과정이 기본 배경이니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고다르와 진 세버그, 장 폴 벨몽도는 물론, 영화에 참여한 트뤼포와 샤브롤, 평론 시절부터 동료인 아녜스 바르다,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 쟁쟁한 이름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지경이다. 여기에 우정 출연 찬조라도 하듯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장피에르 멜빌, 로베르 브레송까지 시침 뚝 떼고 슬그머니 끼어든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시각적 황홀경을 누리는 호사에는 이견이 달리 있을까?

놀라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얼마나 집요하게 캐스팅에 골몰했을까 궁금할 만큼 실제 인물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가 당사자와 놀랍도록 닮은꼴이다. 섭외 담당자를 칭송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기성 배우 대신에 최적화한 이미지와 캐릭터를 최우선 설정한 덕분일 테다. 의도적으로 신예 연기자 위주로 고른 데다, 훗날 프랑스 국민배우로 등극한 장 폴 벨몽도 역은 아예 <누벨바그>가 장편 데뷔작이라 할 정도로 <네 멋대로 해라> 시절 고다르에 빙의한 마냥 링클레이터 감독은 남이 뭐라건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며 집중한다.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영화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화면 속 이미지는 극한의 호흡으로 1959년의 어느 날,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공간을 부활시킨다. 마치 영화와 현실을 왕복하며 조립하듯 작가의 상상을 현실로 옮기던 누벨바그 작가들의 자세처럼, 감독은 그 역사의 현장을 '전설'이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처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영화 악동의 모험을 보면서 꿈을 키운 또 다른 악동이 경의를 담아 어깨에 힘 빼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실험이다. 이건 '찐'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영화의 위기' 논하는 시대에 현대 영화의 시작 복원한 뜻은?
 <누벨바그> 스틸
ⓒ 오드(AUD)
적당히 햇살 따스한 여름날에 세상 고민 다 내려놓고 속 이야기 다 늘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과 교외로 야유회를 떠나 바보처럼 아무 말이나 깔깔 웃으며 즐겁던 경험처럼 <누벨바그>를 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랬다. 유쾌한 여운은 꽤 오래 뇌리에 남아 입꼬리를 계속 올라가게 했다.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다음에 깃드는 건 관성과 정답에 기대지 않고 구르는 돌처럼 끝없이 질주하는 당대 영화인들의 혁신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그런 태도를 현재형으로 재현하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진의 추적이다. 자신이 20살에 처음으로 보고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게 된 <네 멋대로 해라>의 감흥,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곱씹게 한 영감을 바로 지금 현재의 관객이 (자기가 겪은 것처럼) 체험하길 기대하는 영화광의 소망이 흠뻑 전해진다.

1959년의 고다르는 그저 안정된 흥행 성공을 노리며 검증된 문학 작품 각색에 치중하며 고루해지던 동시대 프랑스 주류영화 대신에 불확실하고 어지러워도 흥미롭고 낯선,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려 도전했다. 그런 고다르가 기대한 건 점잖지만 알맹이 없는 덕담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악플'이 난무하며 '영화란 무엇인가?' 토론이란 불씨에 기름을 붓는 발화점으로의 '쓰임'이었을 게다. 각자 취향이라며 다들 상호 토론을 꺼리는 오늘날 되살려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물론 욕을 먹기 딱 좋은, 부담을 감수해야 가능한 도전이다.

그 도발을 위해 발상을 전환하며 체급을 가볍게 만들고자 집착을 거듭한다. 그와 동시에 선배들에게 배울 건 배우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려 애를 쓰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다. 영화 속 제작기를 보고 있자면, 영화의 역사가 <네 멋대로 해라>로 한데 모이고 그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누벨바그>를 본 다음, <네 멋대로 해라>를 다시 찾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과도한 계산이 몸을 무겁게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정반대로 접근한 흔적,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법칙이 된 점프 컷, 즉흥연기, 핸드헬드 촬영기법 등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자면, 시장과 산업의 위기를 홀로 근심하기보단, 어차피 기존 판은 망할 테니 불탄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영화를 상상하는 즐거운 모험을 떠올리게 될 테다. 그게 감독이 원하는, 고다르가 1959년 여름에 꿈꾸던 게 아닐까?

<작품정보>

누벨바그
Nouvelle Vague
2025|프랑스, 미국|드라마, 전기물, 코미디
2025.12.31. 개봉|105분|12세 관람가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기욤 마르벡, 조이 도이치, 오브리 뒬랭
수입 오드(AUD)
배급 메가박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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