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정부가 답해야 할 '절박함'

박상준 2025. 12. 2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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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고양만민공동회, 발달장애인 부모들과 머리 맞대... '2026년 통합돌봄'의 사각지대를 논하다

[박상준 기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닙니다. 내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거리에서, 국회 앞에서, 그리고 삭발 투쟁의 현장에서 외쳐온 이 비명 같은 구호가 고양시의 한 회의실을 무겁게 채웠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될수록 부모의 늙어감은 공포가 된다. 내가 죽고 나면, 덩치 큰 내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26일, 고양시의 시민사회와 복지 전문가, 그리고 발달장애인 당사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양만민공동회(운영위원장 오건호, 대표 이영아)가 주최한 이날 간담회는 다가오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칫 소외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회의에는 이영아 고양만민공동회 대표를 비롯해 오건호 운영위원장, 우림복지재단 회장, 홀트학교 학부모 대표, 이경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고양시지회장과 최미란 이사, 그리고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할 발달장애인 부모 10여 명이 참석했다.
▲ 참석자들이 둘러앉아 심각하게 논의하는 모습 고양만민공동회 주최로 열린 발달장애인 통합돌봄 정책 간담회 현장. 참석자들이 발달장애인 가족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과 정책적 대안을 논의하고 있다.
ⓒ 박상준
2026년 3월, '통합돌봄'은 오는데 우리 아이 자리는 없다?

정부는 오는 2026년 3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 시행을 예고했다. 살던 곳에서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주거, 의료, 요양, 돌봄을 통합적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이날 모인 부모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통합돌봄, 말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청사진 속에 최중증 발달장애인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인 중심의 돌봄 정책에 우리 아이들은 또다시 '깍두기' 취급을 받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참석자들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현재 논의되는 통합돌봄이 주로 '노인' 인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신체적 노화뿐만 아니라 인지적, 행동적 특성상 일반적인 노인 돌봄 시스템에 편입되기 어렵다. 별도의 전문적인 체계와 공간, 인력이 필수적이다.

이영아 대표 "부처 칸막이, 고양시가 먼저 깨야"

이날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이영아 고양만민공동회 대표였다. 그는 단순한 시민사회 대표 자격이 아니라, 발달장애 특수학교인 홀트학교 운영위원장을 6년간 역임하며 현장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한 인물이다.

이 대표는 "발달장애인 정책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등으로 나뉜 '부처 간 칸막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학교에 다니는 장애 학생을 예로 들어봅시다. 보건복지부 예산으로 지원되는 '장애인 활동보조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학교 교문 턱을 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됩니다. 교육부 소관인 학교 안에서는 복지부 인력이 활동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입니다. 결국 교실에서의 배변 처리, 식사 보조는 오롯이 특수교사의 헌신이나 공익근무요원에게 떠넘겨집니다. 이 칸막이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 대표는 중앙정부가 당장 해결하지 못한다면, 고양시 차원의 조례나 시범사업을 통해 '교육+복지'가 융합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학교별로 전담 사회복지사를 배치해 교사는 교육에, 복지사는 돌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
▲ 장애인 통합돌봄 어떻게 만들까? 이영아 고양만민공동회 대표가 발달장애인 통합돌봄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6년간 홀트학교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며 현장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깊이 파악하고 있다.
ⓒ 박상준
"폐교와 동사무소, 발달장애인의 거점이 되어야"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인 '공간' 문제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제안이 쏟아졌다. 현재 발달장애인들이 갈 곳은 학교 졸업 후 주간보호센터나 복지관 등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그마저도 대기가 길어 '복지 로또'라 불린다.

참석자들은 "마을 단위의 촘촘한 돌봄망"을 요구했다. 거창한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유휴 공간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영아 대표와 참석자들은 ▲폐교 및 학교 유휴 공간 ▲주민센터(행정복지센터) ▲경로당 등을 지목했다.

이 대표는 "동장(주민센터장)을 공모제로 선발해 복지 마인드가 투철한 인물을 앉히고, 행정복지센터를 단순 행정기관이 아닌 '동네 거점 돌봄센터'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낮 시간에 비어있는 경로당이나 학생 수가 줄어 남는 학교 교실을 리모델링해 발달장애인 주간 활동 공간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도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홀트학교 인근 유휴 부지 활용안은 구체적이었다. 이 대표는 "홀트학교 유휴 부지에 장애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그룹홈 형태의 주거 공간과 함께,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카페, 베이커리 공장 등을 조성해야 한다"며 "단순히 먹고 자는 것을 넘어 '일자리'가 있는 삶이 진정한 자립"이라고 강조했다.

재원은 어디서? "기업과 연계한 선순환 구조 필요"

모든 정책의 끝은 결국 '예산'이다. 지자체 예산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에 대해 고양만민공동회 측은 '고양시 기업 육성'과 '복지 기금'을 연결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고양시가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육성하되, 그 과실(매출)의 일부를 지역사회 통합돌봄 기금으로 조성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기업은 ESG 경영을 실천해서 좋고, 시는 부족한 복지 예산을 확충해서 좋습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한 복지 생태계입니다."
▲ 장애인 통합돌봄 어떻게 만들까? 이날 회의에서는 2025년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서비스 사업 안내 책자 등을 분석하며 현행 제도의 맹점을 짚어냈다.
ⓒ 박상준
탈시설 논쟁을 넘어... "선택권을 달라"

이날 회의에서는 장애인 복지계의 뜨거운 감자인 '탈시설' 문제도 거론됐다. 정부의 탈시설 정책 기조 속에 기존 거주시설들이 축소되고 있지만, 준비 없는 탈시설은 중증 장애인 가정에 또 다른 '돌봄 폭탄'이 되기도 한다.

이경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고양시지회장을 비롯한 부모들은 "무조건적인 시설 폐쇄나 무조건적인 수용, 양자택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영아 대표 역시 "시설과 탈시설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당사자의 장애 정도와 가족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최중증 장애인을 위한 전문 요양 시설과, 자립이 가능한 장애인을 위한 지원 주택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발달장애인의 도전적 행동(자해, 타해 등)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 전문 치료 병원' 도입도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이를 위해 지역 내 병원들과 협약을 맺고 전담 병동이나 의료진을 확보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시장님, '발달장애인 특별 정책보좌관'이 필요합니다"

열띤 토론 끝에 모인 결론은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이었다.

현재 고양시의 장애인 정책은 담당 부서 공무원의 순환 보직 등으로 인해 전문성과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참석자들은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앤 '통합돌봄 위원회'가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고양시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영아 대표는 고양시에 '발달장애인 특별 정책보좌관' 도입을 강력히 주문했다.

"시장의 의지가 정책을 만듭니다. 하지만 시장이 모든 현안을 알 수는 없습니다. 발달장애인 가족의 피맺힌 목소리를 시장에게 직보하고, 여러 부서에 흩어진 장애인 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전문가급 특별 보좌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고양시가 '특례시'다운 복지 도시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 2025년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서비스 사업 안내 표지 정부의 통합돌봄 사업 안내 자료. 고양만민공동회는 이 지침 속에 발달장애인을 위한 구체적 실행 계획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박상준
정부와 고양시의 응답을 기다리며

이날 고양만민공동회와 부모들이 쏟아낸 제안들은 책상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다. 매일 전쟁 같은 돌봄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찾아낸 생존의 해법들이다.

- 마을 단위 통합돌봄센터 (폐교 및 학교 유휴 공간, 노인정 활용)
- 행정복지센터의 거점화 (동장 공모제)
- 학교 내 부처 칸막이 제거 (장애인활동보조사 교내 진입)
- 기업 매출 연계 복지 기금 조성
- 전문 치료 병원 및 주거/일자리 복합 단지 조성
- 발달장애인 특별 정책보좌관 신설

이 리스트는 이제 정부와 고양시청으로 넘어갔다. 2026년, 통합돌봄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때, 고양시의 발달장애인 가족들은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한 배에 올라탈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이웃과 섞여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고양시를 꿈꿉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던진 묵직한 메시지에, 이제 정부와 고양시가 정책으로 답할 차례다.

이영아 대표가 제안하는 '고양형 발달장애인 통합돌봄' 9대 제언

이영아 고양만민공동회 대표(전 홀트학교 운영위원장)는 이날 간담회에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9가지 핵심 제안을 내놓았다.

1. 기업 상생형 기금 조성 : 고양시 육성 기업 매출 일부를 통합돌봄 기금으로 적립, 예산 한계 극복.
2. 행정복지센터의 허브화 : 동장 공모제를 통해 복지 전문성을 강화하고 동사무소를 1차 돌봄 거점으로 활용.
3. 홀트학교 부지 활용 : 유휴 부지에 주거 시설 및 베이커리/카페 공장 건립으로 '주거+일자리' 원스톱 해결.
4. 유휴 공간의 재탄생 : 폐교 및 학교 빈 교실, 낮 시간대 경로당을 발달장애인 활동 공간으로 개방.
5. 시설/탈시설의 유연화 : 이념 논쟁을 지양하고, 당사자 필요에 따라 거주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보장.
6. 교육-복지 칸막이 철폐 : 보건복지부 지원 장애인활동보조사가 학교 교실 내에서도 학생을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
7. 학교별 전담 사회복지사 : 교사는 교육에, 복지사는 돌봄과 사례관리에 집중하는 이원화 시스템 구축.
8. 전문 의료 체계 도입 : 지역 병원 협약을 통한 발달장애인 전문 치료 병원(병동) 지정.
9. 특별 정책보좌관 신설: 시장 직속의 발달장애인 정책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할 보좌관 임명.

덧붙이는 글 | 기사를 쓴 기자는 고양시에 거주하며 발달장애인 딸을 키우는 아빠이자 시민기자입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존엄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는 사회를 꿈꿉니다. 정부와 고양시의 통합돌봄 정책이 발달장애인 가정을 온전히 품을 때까지, 아빠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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