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나온 작가와 로봇고 교장, '공구'가 '문장'이 되는 기적을 읽다

오성훈 2025. 12. 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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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중미 에세이 <엄마만 남은 김미자>를 읽으며

[오성훈 기자]

▲ 김중미 김중미 에세이 <엄마만 남은 김미자>
ⓒ 오성훈
30년의 기다림, 내 아내와 김중미가 공유한 '연대의 시간'

살다 보면 유독 선명하게 남는 이름이 있다. 내게는 '김중미'라는 세 글자가 그렇다. 33년 교직 생활 동안 세세한 문장은 휘발되었을지언정, "그녀가 다시 책을 내면 고민 없이 사야겠다"는 다짐만은 낡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드디어 그 다짐을 지킬 기회가 왔다. 김중미 작가가 신작 에세이 <엄마만 남은 김미자>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들고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을 다시 펼치며, 나는 김중미라는 이름이 내 개인사를 넘어 우리 시대의 질문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이 내 곁에 이토록 오래 머문 것은 아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내 역시 대학 시절, 김중미 작가와 닮은꼴로 상계동의 가난한 이웃들 곁을 지켰다. 대한성공회에서 운영하던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아내의 청춘은 작가의 '괭이부리말'과 같은 온도로 타올랐다. 그래서 내게 김중미에 대한 글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라, 내 아내와 작가가 공유했던 '연대의 시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지지 않겠다는 선언, '연결'로 일궈낸 삶의 자리

인천 만석동의 척박한 동네에서 사랑과 연대의 물길을 길러 올렸던 그녀가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작가는 고백한다. 엄마처럼 세상에 지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녀는 낮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꿈꾼 것은 가난한 아이들을 성공시켜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소외된 이들을 서로 연결하고, 누구도 고립되지 않게 하는 '연결망'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우리 민족이 잃어버렸던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복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과 조상들이 걸어온 시간의 결과물"이라는 그녀의 선언은,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존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가난을 지탱한 '낭만'이라는 보루, 그 부러운 문화자본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에게 묘한 질투를 느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식이나 취향처럼 보이지 않는 자산을 '문화자본'이라 불렀다. 김중미 작가의 단칸방에는 그 고귀한 문화자본이 흐르고 있었다. 단칸방에서 신년음악회를 틀어놓고 아버지와 왈츠를 추던 기억, 그것은 가난에 잠식되지 않게 그녀를 지켜준 보루였다. "우리를 성장시킨 것은 가난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부모님이 잃지 않았던 예술의 즐거움이었다"는 고백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 낭만적 순간은 그녀가 어떤 어려움에도 주저앉지 않게 한 '영혼의 문화자본'이었다. 나의 부모님 오말수씨와 정길자씨는 내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셨지만, 등록금 대신 공연 티켓을 끊을 만큼의 '철없는 낭만'조차 허락되지 않는 척박한 삶이었다. 그 결핍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아버지의 왈츠는 없었지만, 내 부모님이 일궈낸 그 거친 흙먼지 속에는 낭만보다 질긴 '생존의 존엄'이 깃들어 있었음을 말이다.

"니 왔나?" - 기억의 문이 닫힌 자리에서도 들리는 부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엄마'라는 이름 아래 지워졌던 한 여성, '김미자'의 실존을 복원해 낸다. 인지장애를 겪으며 기억의 문을 하나씩 닫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 '정길자'씨를 본다.

"니가 문 앞에서 엄마, 엄마 해서 나가 봤는데 없다. 니 내려왔나?"

며칠 전 자정 무렵, 학교 일로 우울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내게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다. 인지장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깊어가지만, 아들을 향한 본능적인 부름은 뇌의 논리가 멈춘 자리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나는 현관문을 닫으며 엄마와 이어진 뇌의 문을 닫았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우리는 어쩌면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저변에는 낮은 곳의 이웃과 나누는 연대의 시선이 깊게 흐르고 있다. 미자씨의 상처가 '역사가 개인에게 남긴 흉터'라면, 길자씨의 그 애틋한 전화는 '가난이 모성에게 남긴 훈장' 같은 것이다. 두 어머니는 결국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진실을.

이제는 작가 중미 씨의 '참을성'을 놓아줄 시간

작가 중미씨의 평생을 지탱해온 것은 '참을성'이었을 것이다. 낮은 곳에서 이웃의 고통을 제 몸에 새기며 살아온 그녀의 참을성이 우리 시대의 맑은 문장들을 빚어냈다. 그러나 그녀도 이제 세월 앞에서 자유롭지 못할 나이다.

이제는 삶의 모퉁이를 돌아 자신을 깊이 보살펴야 할 때다. "참을만하다"고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단단했던 참을성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돌보며 독자 곁에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더 오래 우리 곁에서 낮은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작가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

납땜 인두가 문장이 되는 그날까지

세상의 편견 견디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직업계고 출신 나의 제자들에게 다시 이 책을 권한다. 상고를 졸업한 김중미가 우리 시대의 귀한 작가가 되었듯, 지금 너희가 쥐고 있는 공구와 납땜 인두가 언젠가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너희만의 '문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기술은 손끝에서 나오지만, 삶은 그 손끝을 밀고 나가는 마음의 문장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글을 덮으며 다시 이름을 불러본다. 김중미. 그녀가 선물한 '삶의 자리'와 '연대의 물길' 덕분에, 오늘 밤, 나는 조금 더 조용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전화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저 방금 밥 먹었어요. 대문 앞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었나 봐요. 하지만 엄마 마음속에는 제가 늘 가 있을게요. 그러니까 이제 편히 주무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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