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유로 가마니 씌워 학살... 잔혹한 7월의 청주

박만순 2025. 12. 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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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 1945~1960 22화] 소집 피한 5명 때문에 분노한 지서장, 70명 보도연맹원 학살로 이어져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지서 앞마당에는 관내 보도연맹원들로 북적였다.

"인원 파악해!"

김아무개 지서장의 지시로 차석과 순경이 명부를 보며 소집된 이들을 일일이 체크할 때였다.

"그놈들은 뭐야?"
"강외 보도연맹원이랍니다."

김 지서장이 '풋' 하고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외면 보도연맹원들이 자기 발로 스스로 염라대왕 앞에 온 격이니 말이다.

"65명입니다."
"뭐야!"

김 지서장이 발끈했다. 70명이어야 하는데 5명이 누락된 것이다. 청주경찰서의 명령을 받은 청원군 강내지서장은 1950년 7월 5일 보도연맹원들에게 소집 통보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5명의 보도연맹원이 몸을 피했다. 사곡이 오옥진·정종복과 궁현리 김태천·김용각, 그리고 태성리 한종철이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성고문 당하다

5명이 누락된 것을 보고 씩씩거리던 지서장은 순경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모두 잡아 와! 당사자가 없으면 가족이라도 잡아 와."

지서장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 순경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지서로 가면 죽을 것을 뻔히 아는 그들이 순순히 잡혀 올 리 없었다.

며칠 후 대신 잡혀 온 이들에 대한 매타작이 한창이었다. 맨 마지막에 잡혀 온 이는 궁현리 김용립이었다. 그런데 김용립은 구르마에 실려 왔다. 마을에서부터 경찰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이다.

7월 9일, 강내지서 앞마당에는 임시 야외 취조실이 꾸려졌다. 방청객은 강내 보도연맹원 65명과 강외면 보도연맹원 5명이었다.

"김용각이 어디로 도망갔냐?"
"모릅니다."

김 지서장이 묻고, 김용각의 동생인 김용립이 답했다.

"이 새끼도 악질이구만!"

모두 벗겨진 채 김용립은 의자에 광목천으로 묶였다. 지서장(1922년생)은 악마의 미소를 띠며 자신보다 20여 살이나 많은 김용립에게 다가갔다. 다음 순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지서장이 들고 있던 펜치로 김용립의 성기를 비틀었다. '악' 하는 소리와 김용립이 피눈물을 흘렸다.지서장은 다시 성고문을 가했다. 이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당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지켜보는 보도연맹원들 또한 죽을 맛이었다. 단지 이웃 마을 사람이 고문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앞날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용립의 형, 김용각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용각(1897년생)은 해방 후 인민당과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인물이다. 1950년 4월 4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청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0권, 1973).

지서 입장에서 보면 김용각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6.25가 날 때까지 그는 특이한 동향이 없었다. 그러다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때 몸을 피한 것이다.

김용각이 아무리 전과자이지만 석방 후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가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동생이 고문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공개 성고문이었다. 형 때문에 동생이 고문을 당하는 것은 조선시대나 있을 법한 연좌제였다.

"비료 무상 지급" 감언이설로 모집해 학살까지

'묻지마라 갑자생'인 김기반(1924년생)은 일제강점기 말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묵묵히 농사를 지던 그는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경찰은 "비료를 무상으로 준다"거나 "전과를 없애 준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보도연맹원을 모집했다. 지서에서 가입 대상자로 점찍힌 이들 중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지서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거나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과거 좌익활동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하면 국민으로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은 휴지 조각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보도연맹원이라는 딱지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되었다.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으면 청주까지 가야 했다. 청주극장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반공영화를 보기도 했고,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강연을 듣기도 했다. 정기적인 소집보다는 일상적인 통제가 김기반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의 증언이다.

"강내지서에서는 매일 장소를 바꿔 가며 출근부 도장을 찍으라고 했슈. 일주일에 최소한 세 번에서 네 번은 소집했지. 주로 태성리에서 소집을 했는디, 매일매일 달랐어. 아침이면 출근부 도장 찍으러 나갔지 뭐. 당시 출타를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고..."

강외면의 경우, 연제리 남광희를 비롯한 77명의 청·장년이 남로당을 탈당하고 '남로당 탈당 성명서'를 1949년 11월 28일자 <경향신문>에 광고했다. 하지만 그들의 탈당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실상 자신이 빨갱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그들은 모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민애청 남이면 북부 책임자 박제순은 지서에 자수 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 후 박제순은 길가에서 주민들에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을 받았다. 남이면 석곡리에서는 보도연맹이 결성되자 보도연맹원들을 모아 제식훈련을 시켰다.

남이면 비룡리에서는 남이지서 경찰이 직접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을 받았다. 남이면 비룡리 김정갑(1931년생)은 소년형무소 수감생활 후 풀려나자 경찰에서 자술서를 쓰고 바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미원초등학교 교사였던 황원제는 동료 교사 대부분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증언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국민보도연맹사건, 2008).

"얼릉 갔다 올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다
▲ 강내면 보도연맹원 학살지도 청원군 강내면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지도
ⓒ 박만순
6.25가 난 지 10여 일 후, 강내지서에서는 방공호를 판다며 주민들을 소집했다. 탑연리 동산에 방공호를 판 뒤, 보도연맹원들만 골라 지서 창고에 구금했다.

강외면 역시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강외지서장이 지서 창고 문을 열어 줘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서장의 "가라!"라는 말을 청주 충북보도연맹 사무실로 가라는 의미로 이해한 5명이 청주로 가다가 강내지서 경찰에게 붙잡혔고, 이들도 창고에 구금되었다.

"도망가는 놈들은 6촌까지 모두 죽일겨!"

강내지서장의 엄포는 공갈이 아니었다. 며칠 전, 김용립에 대한 성고문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 이들 집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강내지서 창고에 보도연맹원 70명이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화장실은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비치해 놓고, 그곳에서 대·소변을 해결하게 했다. 밖에는 나가지 못했다.

"얼릉 갔다 올게, 잘 놀고 있어."

우천성(1912년생)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막내 유순을 번쩍 안고 눈을 맞추었다.

"아빠 어디 가는데?"
"응, 잠깐 면소재지에 갔다 올 테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이렇게 청원군 문의면 괴곡리 우천성은 동생 석준(1922년생)과 함께 면소재지로 가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되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는 초조한 눈빛의 약 50명 보도연맹원이 있었다.

미원면과 강서면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지서에 구금했다. 부용면과 남이면은 지서와 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먼저 소집된 이들은 지서 유치장에, 나중에 소집된 이들은 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부용면은 갑·을·병으로 나뉘어 세 차례 소집이 있었다. 7월 6일 1차 소집이 있었다. 밤중에 억수같이 비가 오는 날, 경찰이 집집이 다니며 10명을 소집했다. 7월 7일 2차 소집이 있었으며, 부강지서에 소집되어 유치장에서 2~3일 머물렀다. 3차로 소집된 150여 명은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되었다.
▲ 박헌동 부용면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된 박헌동(뒷줄 우측에서 두번쨰)
ⓒ 충북역사문화연대
손발 묶인 채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 수리너머 고개서 울린 총소리

구금된 지 나흘째인 7월 9일, 지서 창고의 이들이 소방서 창고로 이송되었다. 다음 날 미군기의 폭격이 있었다. 폭격을 피해 보도연맹원들이 창고를 나오는 중, 김기반이 탈출을 했다.

폭격이 있던 7월 10일, 보도연맹원들이 탑연리 야산 방공호 앞에 세워졌다. 군경이 60여 명을 죽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 지서장은 지서 창고에서부터 보도연맹원들을 2인씩 삐삐선(군용 전화선)으로 묶었다.

강내지서 경찰 한 명은 탑연리 방공호 앞까지 갔다. 대부분 학살은 CIC가 기획하고 헌병대가 현장에서 주도했으며, 군인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경찰은 보도연맹원 소집과 학살 현장 이송을 책임졌다.

그러나 강내지서는 예외였다. 소집을 피해 달아난 보도연맹원들의 형제를 잡아 구타와 성고문을 가하고, 집을 방화했다. 더군다나 삐삐선으로 묶은 이들을 학살 현장에까지 인계하는 데 지서장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부강지서에 1차로 소집된 10명은 분터골 혹은 피반령에서 처형되었다. 2차로 소집된 26명은 7월 10일 토요타 트럭에 실렸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보도연맹원들은 손과 발을 새끼로 꽁꽁 묶인 채 트럭 적재함에 실렸다.

트럭 네 귀퉁이에 서 있는 군인들이 보도연맹원 머리 위로 가마니를 씌웠다. 가마니를 뒤집어쓴 이들은 누구도 입을 뻥끗하지 못했다. 잠시 후 청주 가는 방향의 수리너머 고개에서 총소리가 났다.

3차로 소집된 150명은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되어 있었다. 계급장 없이 군복만 입은 군인들이 M1에 실탄을 장전하는데, 부강 지서장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군인들은 신경 쓰지 마라"고 해 군인이 철수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 광원마을 청원군 문의면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광원마을(현재는 대청댐으로 수몰됨)
ⓒ 박만순
미원면 보도연맹원 약 30명은 미원과 낭성 경계인 낭성면 머구미고개에서 학살당했다. 남이면은 지서와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분터골에서 학살되었고, 옥산면은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청주경찰서로 이송된 뒤 분터골에서 학살되었다.

대청호에 수몰된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도 죽음의 땅이었다. 문의면 보도연맹원 50명이 가족들의 피울음을 뒤로 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학살이 있은 며칠 후, 김기반은 탑연리 현장에 갔다.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시신들의 배가 차올랐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팔을 잡아당기자 고무장갑이 빠지듯 팔이 쑥 빠졌다. 잡아당기는 이나 옆에 있던 이 모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나마 면내에서 학살된 이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분터골에서 학살된 남이면과 옥산면 보도연맹원 시신은 그럴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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