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연말의 성찰, ‘보편’이라는 말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

만들어낸 합의… 강한 주장
대신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무엇을 돌아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어떤 기억이 남았는지, 무엇이 중요하게 각인되었는지는 제각각이다. 나이와 처지, 그리고 살아온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초등교사는 역사 수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3학년 아이들에게는 2015년도 아득한 ‘과거’라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생생한 기억이, 이들에게는 태어나기 전이거나 기록 속의 연도에 불과하다. 과거라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길이는 현재를 해석하는 감각에도 깊이 관여한다.
사람의 경험은 균질하지 않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세대들이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떤 세대는 고통을 드러내지 말고 참아야 한다고 배웠고, 어떤 세대는 고통을 말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배운다. 각자의 시대에 형성된 감각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판단 기준이 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쉽게 ‘보편’의 지위를 차지한다는 데 있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감각이므로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오해가 시작된다.
‘보편’이란 언제나 옳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한다. 다양한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공존하려면 그런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편적 가치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해 왔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보편적 명제에 대해서조차, 조금만 돌아보면 전쟁과 사형이라는 제도가 살인을 정당화해 온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편은 초월적인 원칙이라기보다 특정한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합의에 가깝다.
한국 사회의 가치 변화 역시 그러했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감각은 발전과 희생, 절약이었다. 개인은 시간을 아껴가며 노동에 전념해야 했고, 사회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했다. 1990년대에 들어 개인의 욕망과 취향이 전면에 등장하는 한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는 성장지상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냈다. IMF 외환위기는 ‘평생직장’과 안정이라는 전제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1세기에 들어 디지털 기술이 일상을 근원적으로 바꾸었다. 무한 경쟁은 기본 조건이 되었고, 각자는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기마다 달라진 시대감각을 제각각 ‘보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금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10년 사이에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두 번째 탄핵의 주인공은 작년 12월의 평범한 밤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아직도 우리는 그 이유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왜 그토록 비상식적인 일을 벌였을까.
여기서 권력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만성적인 잘못을 숨기거나 묵인받는 데 성공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교정할 기회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을까. 권력은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권력자의 결함을 은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쉽다. 들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권위주의적 삶의 경험에서 형성된 믿음과 권력의 자리에서 강화된 자기 확신이 겹치면 현실 인식 자체가 왜곡된다. 이때의 혼란은 개인의 성향을 넘어 구조의 문제가 된다.
경험은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지만, 그것만으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경험의 비대칭이 커질수록 각자가 보편이라 여기는 기준도 서로 어긋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주장이나 더 정교한 기준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과 판단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연말은 지나온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는 동시에 나와는 달랐을 타인의 시간을 상상해 보는 때다. 보편은 소유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반복해서 점검해야 하는 가정에 가깝다. 그 불안정함을 외면하지 않을 때 다름을 인정하는 ‘함께’의 가능성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쿠팡 “외부 유출 없었다” 기습 발표… ‘셀프 면죄부’ 논란
- [단독] 통일교 의혹 공소시효 끝나가는데… 여야 특검 추천 평행선
- 맞벌이 신혼 100만원 세액공제… 쌍둥이 출산땐 최대 380만원
- 美파워볼 복권 이월 당첨금 2.6조원, 마침내 ‘잭팟’
- 계란 한 판 7천원 넘어…조류 인플루엔자 확산에 수급 불안도
- “오빠 나는 연인 사이에…” 충북도 공문에 ‘사적 대화’ 황당 실수
- ‘K팝 전문가’ 김영대 음악평론가 별세…향년 48세
- 中연구팀, 유전자 편집으로 ‘가시 없는 붕어’ 개발
- ‘마약 혐의’ 황하나, 도피 중 자진 출석…경찰, 영장신청 예정
- 돌아온 서학개미 양도세 깎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