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글쓰기의 치명적 문제점... 이 영화 보면 느낄 겁니다

오길영 2025. 12. 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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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의 뾰족한 시각] 몸이 없는 AI의 예술은 가능한가: 영화 <국보>

[오길영 기자]

인공지능(AI)을 둘러싸고 많은 얘기가 나온다. AI의 기술적인 측면에 문외한인 나는 인류가 만들어 낸 이 새로운 기계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AI가 내가 몸담은 대학과 내가 하는 일인 글을 읽고 쓰는 행위, 혹은 문학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러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미룰 수 없게끔 AI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얼마 전 내가 지도하는 박사학위논문 심사 과정에서도 AI 활용 여부를 판단하는 지침이 처음 나왔다. AI를 활용한 문장(특히 외국어) 교열, 심지어는 글쓰기를 아예 AI에 맡기는 일도 급격히 확산하는 분위기다.

얼마 전에 들은 충격적인 사례 중 하나. 학생들에게 상호토론을 시켰더니 상대방의 질문을 AI에게 묻고 그 답안을 받아 그대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인간의 사유와 글쓰기 능력은 급격히 퇴보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려는 교육 방법으로서 여러 제안이 나온다. 비판적 사유를 길러야 한다, 해답이 아니라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AI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슬기롭게 이용하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등등.

모두 설득력 있는 제안이지만 AI 이용에 대한 깊은 숙고와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상황은 훨씬 급격하게 AI에게 모든 걸 의존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인간은 고통스럽게 비판적 사유를 하기보다는 편리함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런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AI에게 굴복할 것이다. 한탄하는 게 아니다. 돌아가는 상황에 관한 판단이다.

AI에 의존하는 사유와 글쓰기는 급속히 확산하겠지만, 나는 삐딱한 태도를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아이디어와 주제만 주면 척척 글을 생산하는 AI의 모습은 마치 AI가 생각해서 글을 쓰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의인화(擬人化, Anthropomorphism) 효과다. 언젠가 AI가 정말 인간처럼 사유하고 감정까지 갖게 될 때가 올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조립해서 그럴듯한, 매끈한 글을 생산할 뿐이다. 물론 사람의 글쓰기도 기존에 나온 데이터를 활용하고 그걸 가공해서 조금의 독창적인 생각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몸과 마음의 고통과 정념이 글에 새겨진다. 그게 글의 개성이다.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글은 단어들의 조합, 문장들의 배열이라는 차원에 그치는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매끈하고 조리 있게 결합하면 좋은 글이 되는가? 나는 사람이 썼든 AI가 썼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 정념, 고통이 없이 조립한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민한 독자는 그걸 감지할 거라고 믿는다. '영혼이 있는 문장', '피와 땀이 배어 있는 문장'이란 표현은 분명 케케묵은 말이지만, 나는 그런 표현에 여전히 어떤 진실이 담겨 있다고 판단한다. 한마디로 AI와 인간이 하는 글쓰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몸의 있고 없음이라고 본다.

여기서 몸은 단지 물리적 육체만이 아니라 몸이 발생시키고 얽혀 있는 정념, 기운, 고통, 땀, 눈물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AI에게는 그런 몸이 없다. 몸으로 쓰는 글쓰기와 데이터로만 쓰는 글쓰기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설령 AI에게 아이디어와 글감을 제공해서 글을 만들더라도, 거기서 그치지 말고 최종적으로는 자신만의 감각과 취향과 느낌으로, 자기 몸으로 글에 영혼을, 몸에서 나오는 공력을 새겨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래전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온몸으로 쓰는 글쓰기'의 의미를 AI 시대에 바꿔서 적고 싶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글쓰기 과정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싸움의 흔적이 담기지 않은 글은 반드시 표가 난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영화 <국보>를 보면서 떠올린 질문
 영화 <국보> 스틸컷
ⓒ (주)NEW
3세대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를 보면서도 비슷한 질문이 떠올랐다. <국보>가 보여주는 예술의 경지, 영혼과 몸의 공력이 들어간 예술의 경지에 몸이 없는 AI는 이를 수 있을까? 설령 AI가 휴머노이드 로봇에 장착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가능할까?

<국보>는 일본에서 22년 만에 실사영화로서 1천만 관객을 넘는 흥행을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일본의 전통 예술인 가부키(歌舞伎)를 소재로 삼는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게 뜻밖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가부키의 역사와 온나가타(女形)를 소개한다. 온나카다는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맡는 남성 배우를 가리킨다. 1620년대 풍기 문란을 우려해 여성 배우의 출연이 금지되면서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다.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난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어떤 일로 부모를 잃는다.

우연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가부키 명문가의 한지로(와타나베 겐)는 키쿠오를 수습생으로 받아들인다. 키쿠오는 한지로의 아들인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우정을 나누며 배우로 성장한다. 두 젊은이가 보여주는 혈통(슌스케)과 재능(키쿠오)의 갈등은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였기에 그것이 특별하지는 않다. 영화는 가부키의 주요 공연을 섬세한 촬영으로 화려하게 보여주는 재미를 주지만, 더 중요한 건 키쿠오와 슌스케가 10대부터 수십 년에 걸쳐 이뤄 가는 인연의 전개, 몸의 예술인 가부키의 대가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소설의 하위 장르(sub-genre) 중에 예술가 소설(Künstlerroman, the novel of artist)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등이 그런 작품이다. 이 소설들은 젊은 예술가의 모습을 그린다. 당연히 예술가가 되려는 청년이 느끼는 예술과 삶의 관계,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청년의 욕망과 그것을 가로막는 힘들(사회 제도, 이데올로기, 종교, 정치적 억압 등) 사이에 생기는 충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고독감 등을 다룬다.

<국보>에도 비슷한 주제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훨씬 길다. 가부키 전수를 하는 두 젊은이의 삶을 10대(1960년대)부터 60대(2010년대)까지 다룬다. 50여 년에 걸친 시대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키쿠오와 슌스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상처를 몸과 영혼에 새기고 다시 가부키의 세계로 돌아온다.

진정한 예술의 힘
 영화 <국보> 스틸컷
ⓒ (주)NEW
앞에서 나는 AI가 인간의 사유와 글쓰기를 급격히 잠식해 가는 현실에서 인간이 쓰는 글의 고유성은 기계(AI)가 갖지 못한 몸으로 쓰는 글의 힘에서 나올 거라고 썼다. 나는 그걸 몸으로 쓰는 글만이 지닌 정념이라고 표현하겠다. 몸이 없는 AI가 멋지게 조립한 글이 그런 정념을 가질 수 있을까? 글의 예술인 문학이 아니라 가부키같이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음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몸의 움직임을 질타하는 스승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춤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기예를 닦아도, 감정이 담기지 않은 춤, 영혼이 담기지 않은 글은 표가 난다는 뜻이다.

<국보>에서 키쿠오는 악마와 거래해서라도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숨겨 놓은 아내, 딸도 버린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배우, '인간 국보'(일본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된다.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최고의 예술이 삶을 대체할 수 있는가? 영화에서는 자신을 버린 주인공을 질타하는 딸이 하는 말이 나온다. 삶과 예술의 선택지에서 예술을 선택한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다. "당신을 아버지로 생각한 적 없지만, 당신의 가부키를 보면서 다른 삶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에는 박수를 쳤다." 이게 예술의 힘이다. 때로 예술은 삶을 초월하거나 삶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삶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냥 돌아오는 게 아니라 몸과 영혼에 새긴 삶의 가르침이 관건이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예술은 삶의 모방이 아니다. 현실의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아무리 추하고 끔찍하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인간 말종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예술은 현실에서 사라진, 현실에서 감춰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가 예술을 찾는 이유다. 그리고 그런 예술의 힘은 인간의 몸과 그 몸에 배어 있는 수많은 정념을 버릴 수 없는 한, 다시 김수영이 말한 온몸으로 쓰는 글쓰기, 온몸으로 행위를 하는 예술에서 나올 것이다. <국보>가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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