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서 MBTI 지도를 접고 마주해야할 것
[조미선 기자]
"너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나르시시스트는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어. 자기 귓볼보다 멀리 있는 어떤 것에도 공감을 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낭비했어."
그녀가 보낸 이별 통보는 주인공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는 처절한 선고였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서점을 서성이던 그는 우연히 두툼한 책 한 권을 떨어뜨린다. 현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다.
바닥에 떨어진 책장 사이에서 그의 시선을 멈추게 한 단어는 '공감'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누군가의 삶을 전기로 써 내려간다면, 그 사람을 진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밖에 모른다는 비난과 타인을 알지 못했다는 자책은 곧 집요한 기록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에 새로 걸어 들어온 여성, 이사벨의 전기를 쓰기로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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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랭 드 보통 <키스 앤 텔> 키스 앤 텔 책 표지 |
| ⓒ 조미선 |
그의 분석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관찰이자, 상대를 규정해야만 비로소 안도하는 서구적 지성의 외로운 초상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개념화하고 범주화할 때 비로소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상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일 때, 이러한 앎은 상대를 오독하거나 그 고유함을 뭉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키스 앤 텔>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이성의 열망이 도리어 관계를 가로막는 역설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경고한 '전체성'의 횡포다. 타자를 인식의 틀에 가두는 순간, 관계는 미처 꽃피기도 전에 질식하고 만다. 상대를 다 안다고 믿는 찰나, 그를 향한 모든 물음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자의 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익다. MBTI, 심리테스트, 혈액형.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류한다. "MBTI가 뭐예요?"라는 질문과 함께 열여섯 가지 유형 중 하나로 상대를 파악했다고 믿는다. 화자가 이사벨에게 설문지를 건네듯, 우리도 각종 테스트 결과로 상대를 독해하려 한다.
역설적이게도 화자가 정보를 쌓을수록 이사벨은 생동감을 잃은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박제되어 간다. 사람은 설명되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결국 이사벨을 지치게 한 것은 끊임없이 번역되어야만 하는 관계의 피로감이었다. 화자는 맥락을 이해해야만 안심했지만, 이사벨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내 글은 모두 일종의 자서전이죠. 나는 늘 독자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련을 맺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 고백처럼 소설 속 화자에는 작가의 젊은 날이 투영되어 있다. 사실 누군가를 알고 싶어 분석하는 노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타인이라는 미지의 대륙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름의 지도를 그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심히 기록하는 일은 타인이라는 세계를 향한 가장 지성적인 예의일지도 모른다.
지도를 접고 '얼굴'을 마주하는 일
하지만 사랑의 비극은 내가 그린 지도가 곧 상대의 실체라고 믿는 오만에서 시작된다. 지도가 "여기엔 차가운 강이 흐른다"라고 말해도, 눈앞의 그가 따뜻한 꽃밭처럼 웃고 있다면 기꺼이 지도를 접어둘 줄 아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분석의 결과를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겨두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아는 당신은 이런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당신도 그래?"라는 질문은 상대를 가두는 대신 확장시킨다. 끝내 알고자 노력하되 내가 틀렸음을 언제든 인정할 준비를 하는 것.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성적인 예의라면,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신비 앞에 머무는 것은 '영혼의 예의'다.
신혼 초의 나 역시 이사벨보다 화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남편을 내 지도 안에 가두고 끊임없이 개념화했다. 지도 밖으로 삐져나오는 그를 느끼기보다 내 논리로 번역해내려 애썼다. 그때 느꼈던 지독한 답답함은 사실 내 지도가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지도와 실제 남편 사이의 거대한 틈은 나를 화나게 하는 오류가 아니라, 내가 결코 다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임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해야 할 일은 그를 향한 전기를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다 알 수 없는 타자의 얼굴 앞에 겸허히 머무는 일이다. MBTI의 네 글자 너머, 내가 결코 번역할 수 없는 상대의 신비를 응시하는 것. 그것이 알랭 드 보통과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사랑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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