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중독에 빠진 택배기사, 세 번의 기회와 파국

김상목 2025. 12. 2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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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위험사회>

[김상목 기자]

2001년 겨울, 낮엔 택배, 밤엔 대리운전으로 성실히 일하던 '영길'은 손에 쥔 건 별로 없어도 사랑하는 연인 '하림'과 결혼을 기약한 사이다. 몇 년간 고생한 덕분에 작은 아파트 청약도 당첨된 상황, 그는 오랜만에 기분도 낼 겸, 하림과 그녀의 엄마를 초대해 근사한 한 끼를 대접하고 선물도 내놓는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실은 영길의 행운에는 심상찮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번의 행운을 요즘 부쩍 자주 찾던 강원도에서 얻었다. 몇 해 전 생긴 내국인 출입 가능한 카지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서 우연히 돈을 딴 덕분에 영길은 형편에 맞지 않는 작은 사치를 부려본 것. 5분 만에 천만 원을 벌 수 있는 그곳에서 횡재해 보니, 종일 열심히 일해도 8만 원 벌던 자신의 생업은 우스워 보인다. 생업수단인 바로 1년 전 뽑은 배달 트럭을 사채업자에 담보로 맡기고 1천만 원을 빌린 그는 더 큰 행운을 기대하며 카지노로 향한다.

일확천금 욕망이 강림한 현세의 지옥도
 <위험사회> 스틸
ⓒ 스튜디오 린린
1998년,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던 것 중의 하나, 강원도 탄광들의 폐광 예고에 따른 지역 경제 붕괴 대책으로 내외국인 모두 출입 가능한 카지노 유치에 따라 강원랜드가 탄생한다. 물론 도박장 외에 스키장, 리조트 등이 함께 들어섰지만, 수익을 낼 것으로 기대된 건 누구나 예상하듯 카지노였다. 정선군은 강원랜드 덕분에 넉넉한 세금을 걷고 지역경제 절반 이상이 의존하는 상태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물론 부정적인 면까지도.

몇 해마다 잊을만하면 강원래드 주변 도박 중독자 문제를 다루는 미디어 보도를 접하면 소름이 돋는 지경이지만, 왜 평범하던 이들이 저렇게 도박에 집착해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는지 잘 이해하긴 쉽지 않다. 빠져보지 않으면 실감하긴 힘든데, 그렇다고 체험하긴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그렇게 도박 중독은 늘 머나먼 흥미 거리로만 남았다.

<위험사회>는 독립영화 중에서 드물게 강원랜드 도박 중독 문제를 다룬다. 의외로 한국 독립영화에선 카지노 도박 소재를 접하기란 드문 편인데, 이는 주요 창작자 집단이 20대에서 30대 초반 전후인지라 실물 도박장에 접할 기회가 위 연령대에 비해 적은 탓이다. 오히려 사이버 도박이나 주식, 코인 같은 일확천금 수단이 더 익숙하고 자주 소재로 활용되는 편이다. 그러나 대상이 다를 뿐, 근면 성실한 삶이 무의미해 보이는 세태에서 유발된 사회적 풍토와 연결하면 공통분모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 속에서 도박 중독자들은 관객과 별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존재들이다. 주인공이라 할 영길은 도박에만 손대지 않았다면 그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미래를 꿈꾸는 성실한 청년이고, 그와 기구한 인연으로 묶이는 '진수' 역시 자식을 끔찍이 아끼며 여유로운 중산층으로 살던 지식인 계층에 속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시골 역사에서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구걸하는 주인공의 눈앞에 비친 (태반이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대합실 승객 군상 역시 그저 동네에서 흔히 볼법한 이웃들의 풍경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 평범한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도박에 빠지는 과정 역시 대단한 계기랄 게 없다. 그저 호기심에 한 번 발울 들였다가 별 어려움 없이 돈을 따는 맛에 가랑비 옷 젖듯이 수렁에 빠지는 셈이다. 실제로 강원랜드 카지노 구내엔 외국 도박장에선 금기가 된 거울과 시계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데, 이는 이용객이 도박에 탐닉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두고 이런 미봉책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파괴되는 주인공과 주변인물 묘사의 현실감
 <위험사회> 스틸
ⓒ 스튜디오 린린
영길이 영화 속에서 점점 더 초췌해지는 과정, 끼니를 거르다 쾡해진 얼굴에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난 몰골은 그런 현실의 반영이다. 여기에 그가 돈을 꾸는 사채업자가 고객을 대하는 태도 변화도 주목할 요소다. '사장님'에서 점점 말을 낮추며 하대하는 건, 이미 수백 명 도박 중독 고객을 상대해 봤을 그의 냉혹한 인간관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OTT 드라마 <카지노>에서 '호구 형'으로 '밈'화된 중소기업 사장의 몰락처럼,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영락해가는 초상 역시 보는 이를 으스스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길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트럭을 담보로 천만 원을 사채업자에게 빌린다. 길수 역시 늘어난 빚을 갚기 위해 부모님 명의 아파트를 넘기면서 천만 원만 달라고 사정한다. 기왕 도박에 빠진 김에 더 큰 금액을 구하지 않고 왜 천만 원만 딱 빌린 걸까? 지극히 현실적 이유가 있다. 작품 속 배경인 2001년 당시 강원랜드 1일 배팅 최대 금액이 1천만 원으로 제한된 탓이다(현재 2천만 원 한도). 그들이 도박에 뿌릴 수 있는 최대치에 승부를 걸고자 함이다. 물론 누구도 돈을 따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지만 말이다.

영화는 <타짜> 부류의 도박 소재 영화가 보여주는 현란한 승부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우리와 원래 다르지 않던 인물들이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에 홀리듯 빠져들며 파괴되는 경과를 담담하게 그리는 데 주력한다. 영길이 처음 도박에 손을 댄 건 허무맹랑한 욕망이 아니라 조금만 더 빨리 목돈을 마련해 결혼자금과 아파트 선금을 치르고 싶은 소망뿐이다. 그러나 애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것처럼 돈을 벌어 나가는 건 희귀한 경우다. 그러나 작은 성공을 맛본 그에게 이런 경고는 소귀에 경 읽기와 다르지 않았다, 재수가 없었을 뿐, 그저 일시적 실패에 불과하다는 망상이 돋아난다.

영길은 거듭해서 망상에 빠져든다. 마치 바닥이 없는 수렁에 끌려가듯 말이다. 끝내 돌아갈 여비도 구할 수 없어 무턱대고 인적 없는 도로에서 태워달라 하소연하거나 심지어 역무원에게 차표 값을 빌려달라 떼쓴다. 이골이 난 탓인지 역무원은 돈을 꿔주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측은한 나머지 빵을 내민다. 영길은 게걸스레 빵을 베문다. 차를 태워준 동네 노인의 트럭에 있던 삶은 감자를 군침을 삼키다 하나만 달라 하고, 눈치를 보다 하나 더 먹어도 되냐고 묻는다. 자신은 알지 못해도 그의 몰락을 누구나 알아챈다는 징후다. 오직 본인만이 현실을 외면할 따름이다.

주인공에게 찾아온 세 번의 기회, 결과는?
 <위험사회> 스틸
ⓒ 스튜디오 린린
누구나 인생에 세 번은 행운이 깃든다고 한다. 영길에게도 역시 그런 계기는 주어진다. 전래 괴담 동화 '여우 누이'에서 오빠들에게 주어진 세 개의 비단 주머니처럼. 물론 기회를 활용해 위기를 모면하는 건 각자의 몫이란 건 분명하다.

첫 기회는 운 좋게 얻어탄 트럭을 몰던 동네 노인 '철산'과의 만남이다. 딱한 처지를 알아챈 그는 돌아갈 여비도 없는 그에게 따스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며칠간의 아르바이트를 제공한다. 마치 장발장이 은촛대를 훔친 걸 눈감아준 미리엘 주교처럼 그 역시 영길을 용서하며 재기의 기회를 선물한다. 이때 서울로 돌아갔다면 영화는 훈훈한 단편으로 마무리되었을 테다. 마치 동네의 신령처럼 철산은 정선 카지노가 들어서게 된 사연과 동네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카지노 유치와 함께 지역 사회에 도박 중독이 퍼지지 않도록 지역 주민은 월 1회로만 출입이 제한된 탓에, 노인은 묵묵히 생업을 이어가며 수많은 '영길'들을 봐왔을 게다.

다음 기회는 영길의 영락을 먼저 겪었고 더는 헤어날 수 없는 처지로 추락한 길수가 베푼다. 그는 마치 자신의 희생으로 영길이 빚을 청산하고 다시는 카지노 근처에도 발들이지 말라고 떠밀 듯 배려한다. 그가 배려한 덕분에 영길은 목숨을 부지해 강원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웬만하면 이쯤에서 누구라도 도박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닫고 손을 씻을 만하다.

하지만 영길은 결국엔 다시 제 발로 도박장을 찾는다. 그러나 감독은 개인의 도덕적 파산으로 이 딱한 상황을 편의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서울로 돌아가 다시 원래의 성실한 삶으로 돌아갔던 그는 자신이 꿈꾸던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계기를 통해 자포자기 심정으로 또다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파국으로 달려든다. 아마 본인 역시 결말을 예상한 파멸일 테다. 그러나 완전한 종말로 종지부를 찍기 직전, 마지막 비단 주머니와 만난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갱생이 가능하다는 작은 희망을 남겨둔 것처럼.

사실에 근접한 음울한 풍경을 묵묵하게 구현하다
 <위험사회. 스틸
ⓒ 스튜디오 린린
평범한 청년의 꿈, 사랑하는 이와 작은 아파트에서 부모님 모시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픈 열망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루기 힘든 꿈이 되어가는 중이다. 부모에게 물려받거나 일확천금을 벌어야 실현 가능한 21세기 대한민국 세태에서, 이제 성실한 노동과 저축은 조롱거리로 전락할 지경이다. SNS 곳곳에 쉽게 돈 버는 비법이나 주식과 코인으로 돈 버는 비밀이 널려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위험사회>라는 제목 그대로 지뢰밭처럼 온통 사방에 유혹이 가득한 현실이 본격적으로 발원하던 20세기 말 ~ 21세기 초반을 배경 삼아 영화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아니 점점 더 심화 일로인 사회적 위기의 기원을 그린다. 현란하고 기상천외한 도박사 '타짜'들이 아닌, 누구라도 외면하고픈 비참한 추락 군상들을 주역으로 세우고 그들이 만나게 될 위험을 차례로 형상화해 현실의 공포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채업자와 그가 고용한 해결사로 상징되는 현실 위험은 천천히 합법적 수단으로 출발해 서서히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도박 중독자들을 옥죈다.

실제 강원랜드 일대의 풍경, 초췌하고 덥수룩한 중독자들의 말로와 함께 지역 전당포 주변에 즐비한 임자 잃은 자동차들, 여비를 구할 최후 방법인 도박장 출입 금지 신청을 머뭇거리는 행태 등이 다소 예상되는 진행 과정과 익숙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텔레비전에서 종종 접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속 현시 중독자들 영화의 초상이 더 으스스하단 것이다.

<작품정보>

위험사회
Risk Society
2023|한국|드라마/로맨스/멜로/범죄
2025.12.24. 개봉|100분|15세 관람가
감독 김병준
출연 박우건, 장준휘, 황상경
제작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배급 스튜디오 린린

2023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부문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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