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와 차이콥스키를 좋아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공연

이채훈 2025. 12. 2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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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진화하며 다양한 관객에게 다가가는 걸작, '호두까기 인형'의 다채로운 공연들

[이채훈 기자]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차이콥스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호두까기인형>을 빼놓은 채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낼 수 없다. 독일 작가 E.T.A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인형과 생쥐왕>를 원작으로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한 이 발레는 1892년 초연된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호두까기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 클라라(마리)가 꿈속에서 왕자로 변한 인형과 함께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으로, 어린이는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고, 어른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온가족이 함께 보기에 제격이다.

<호두까기인형>을 쓸 때 차이콥스키는 여러모로 우울한 상태였다. 아낌없이 자기를 후원하던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자 그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고, 갑자기 푹 늙어버렸다. 그는 '어린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발레를 써 달라'는 마린스키 극장의 요청에 응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파리 여행 중 예쁜 종소리가 나는 건반악기 첼레스타를 발견한 뒤 마음을 다잡고 이 아름다운 작품에 착수할 수 있었다.

어린이에게 바친 이 발레는 차이콥스키가 사랑하는 누이동생 알렉산드라에게 바친 작품이기도 하다. 1막을 절반쯤 작곡하고 '눈꽃송이 왈츠' 스케치를 마무리할 즈음, 사랑하는 누이동생 알렉산드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차이콥스키는 2막 '그랑 파드되'에 하강하는 선율을 사용하고 '사탕 요정'의 캐릭터에 각별한 애정을 담아서 누이 동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때면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국립발레단(단장 강수진)은 오는 2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유니버설발레단(단장 문훈숙)은 대구와 인천에 이어 오는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986년부터, 국립발레단은 2000년부터 해마다 이맘때면 공연하는데 예외 없이 매진 사례를 기록해 왔다.

티켓은 오픈하기가 무섭게 매진된다고 한다. 한 관계자에게 "크리스마스가 코앞인데, 공연 당일 현장에서 환불표를 구할 가능성이 있냐"고 물어보니, "장담하기 어려우니 권장할 수 없다"는 응답이었다. 올해 티켓을 구하지 못한 분은 아무래도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호두까기인형>의 여러 프로덕션 중 어떤 것을 고를지 판단할 근거를 간략히나마 짚어볼까 싶다.

같은 작품, 다른 공연... 비교해서 보는 재미
 크리스마스에 빼놓을 수 없는 공연.
ⓒ chadmadden on Unsplash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서로 다른 안무를 채택했기 때문에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국립발레단은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한 볼쇼이 버전으로, 주인공 이름이 '마리'이며 호두까기인형은 나무 인형이 아니라 어린이가 연기한다.

이에 반해 유니버설발레단은 바실리 바이노넨이 안무한 마린스키 버전이며, 주인공 이름은 '클라라'고 호두까기인형은 그냥 나무 인형이다. 두 발레단은 1막에 등장하는 광대 할리퀸과 콜롬빈도 다르게 생겼고, 2막 디베르티스망에 나오는 스페인춤, 중국춤, 아라비아춤 등 모두 의상과 안무가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국립발레단은 마리와 왕자가 환상의 나라로 떠날 때 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반면, 유니버설발레단은 클라라와 왕자가 사슴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간다는 점이다. 2막 '프랑스 춤'(갈대피리의 춤)의 경우 국립발레단은 강아지 인형이 등장하는 반면, 유니버설발레단은 양치기가 못된 늑대를 혼내주는 스토리가 등장한다.

두 발레단 모두 오케스트라 연주가 함께 하니, 라이브 공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볼쇼이와 마린스키 중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 없듯,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볼 여지가 있지만, 선택을 위해서라도 양쪽을 다 감상해 보셔야 할 듯하다.

두 발레단 이외에도 선택의 여지는 더 있다. 서울발레시어터(단장 최진수)는 2007년부터 올해까지 19년 동안 해마다 공연을 이어왔다. 지난해 서울, 부산, 여수에 이어 올해는 제주 서귀포 예술의 전당(지난5~6일)에 이어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맥홀에서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이 프로덕션의 가장 큰 특징은 2막 '디베르티스망'에서 한복을 입은 거대한 '진저 마더'가 등장하고, 어린이들이 그녀의 치마 사이로 등장하며, 장고춤, 소고춤, 상모돌리기 등 우리 전통 연행을 가미했다는 점이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활용한 이 안무는 K컬처가 지구촌의 화두인 지금 해외에서도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클라라의 대부인 드로셀마이어의 마술을 강조하고, 어린이들의 무용을 많이 배치한 것은 어린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발상이었다. 초대 단장인 제임스 전의 안무는 1892년 초연 때의 구성을 충실히 따랐다고 한다.

큰 틀에서 조지 발란신 안무의 뉴욕시티발레를 연상시켰지만, 1막 생쥐떼의 동작을 인간적으로 애교있게 묘사한 것, 눈꽃송이의 왈츠에서 남성 무용수들이 등장하여 혼성 군무를 추도록 한 것 등은 개성 있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음악을 MR로 처리한 것은 다소 아쉬웠고, 볼륨이 너무 높은 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단장 최진수가 무대에 올라와서 작품을 해설하고, 몇 가지 마임 동작을 직접 보여주는 등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한 것은 호감이 갔다. 더 많은 대중에게 아름다운 평생의 추억을 선사하려는 발레단의 노력은 인상적이었다.

국립발레단과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솔로이스트를 지낸 김용걸이 안무와 연출을 맡은 <호두까기 인형 : 해설이 있는 명품 발레>도 지난 12월 5일부터 13일까지 이화여대 ECC 삼성홀에서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프로덕션은 마법사인 드로셀마이어가 무용은 물론 친절한 해설자 역할까지 맡아서 내레이션으로 어린이들과 자연스레 교감하는데 성공한 것이 큰 특징이었다.

스페인, 아프리카,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의상과 민족적 특징을 살린 무대는 시각적 재미를 더하며 어린이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주요 출연진은 공연 종료 후 포토존에 나와서 관객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는데, 이 또한 관객을 배려한 친절한 서비스였다. 이 공연을 본 어린이들은 이후에도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오래 간직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각색된 <호두까기인형>이 다채롭게 진화하고 있다. 와이즈발레단의 경우 비보이, 탭댄스 같은 현대적 요소를 추가했다고 한다. 하남문화예술회관, 공주문예회관, 화성아트홀에 이어 서울 나루아트센터(오는 28∼31일)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호두까기인형>이 가까운 곳에서 살아 춤추니 연말이 즐겁고 풍요롭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감상 포인트가 생겨나고, 이러한 디테일에 대한 인식이 자라나면서 이 발레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욕구를 심어준 것은 뚜렷한 성과였다. 모든 발레단과 무용수들, 스태프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하며, 새해에도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오시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문화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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