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새판 짜는 미국의 큰 그림 [홍익희의 비트코인 이야기]

2025. 12. 2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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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프로젝트 크립토’부터 ‘혁신 면제’까지

미국에서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가 승인했을 때 많은 투자자들은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들어왔다”며 환호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ETF가 바꾼 것은 어디까지나 비트코인이라는 특정 자산의 지위뿐이었다. 가상자산 시장 전반의 ‘금융 시스템 골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사뭇 다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지난 7월 발표한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와 12월 초 공개한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는 가상자산 시장 전체의 규칙을 다시 짜는 작업이다. ETF가 비트코인의 제도권화를 위한 ‘작은 문’ 하나를 연 것이라면, 앞선 두 조치는 가상자산 시장이 제도권에 편입될 수 있는 넓은 길을 연 셈이다.

지니어스 법안에 서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UPI=연합뉴스)
프로젝트 크립토 뭐길래

금융의 ‘온체인 전환’ 선언

오랜 기간 미국의 암호화폐 정책은 모순적이었다. 규정은 없는데 제재는 많았다. 이더리움을 증권으로 볼지, 혹은 스테이블코인(잠깐용어 참조)은 은행 규제를 받아야 하는지, 탈중앙화 금융(DeFi·잠깐용어 참조)은 누구의 감독을 받아야 할지 등을 두고 명확한 해석 없이, 규제 공백에 시달렸다. 기업은 언제 제재를 받을지 몰라 불안에 떨었고 투자자 입장에선 장기 투자 계획을 수립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SEC가 내놓은 프로젝트 크립토와 혁신 면제는 이 틀을 완전히 뒤집었다. 어떤 혁신을, 어디까지 허용하겠다는 명확한 룰이 제시됐다. ‘규칙 없는 운동장’을 벗어나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운동장’을 만들어준 셈이다.

프로젝트 크립토는 단순한 규제 완화책이 아니다. 미국 증권 시장을 디지털 자산과 온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재편하겠다는 미국식 금융 대전환 로드맵이다.

핵심은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가상자산 기업 등 시장의 해외 유출을 막고, 미국 회귀를 유도한다. 해외법인 구조와 역외 거래소에 의존하던 시장을 정리하고, 미국 규제 틀 안에서 투명하게 사업을 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둘째, 커스터디(수탁) 인프라의 제도권화를 추진한다. 지갑·수탁·보관 방식이 제도적으로 인정되면, 기관투자가·연기금도 디지털 자산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셋째, 슈퍼앱(super-app)을 허용한다. 하나의 앱에서 가상자산·증권·스테이킹·대출이 통합되는 구조다. 금융 규제의 파편화가 아니라 금융 서비스의 통합을 위한 준비다.

넷째, 증권과 채권 시장의 온체인 전환을 추진한다. 온체인은 거래나 데이터가 블록체인 위에서 직접 기록·처리되는 구조다. 기존 금융 시스템(은행 전산)에 기록되던 것이 블록체인 장부에 기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온체인 전환을 토대로 앞으로는 주식·채권·ETF 거래에도 블록체인 기술이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전통 금융과 탈중앙 금융(디파이, DeFi)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프라 위에서 공존하게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혁신 자체를 제도권에서 성장시키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했다는 데 눈길이 간다. 필요하다면 기존 규정을 고쳐서라도 새로운 사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유연성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크립토’가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그간 규제해오던 암호화폐를 이제는 배척하지 않고, 미국 금융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길을 선택했다.

‘프로젝트 크립토’를 발표 중인 폴 앳킨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SEC 갈무리)
실무적 장치 ‘혁신 면제’

시장이 기다리던 ‘실험실’

‘프로젝트 크립토’가 큰 그림이라면, ‘혁신 면제’는 그림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실무적 장치다. 혁신 면제 제도 덕분에 기업은 간단한 신고 절차만으로 12~24개월 동안 사업을 테스트할 수 있게 됐다. 복잡한 S-1 같은 증권 등록 절차를 밟지 않아도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시험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초기부터 규제 완화된 환경에서 사업을 열어보고, 투자도 받고, 수익도 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물론 고객 신원 확인(KYC) 같은 기본적인 투명성 규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 제도의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규제를 어기고 소송 리스크를 떠안지 말고, 제도권 안에서 합법적으로 먼저 실험해보라”는 것이다.

적용 범위 또한 파격적이다. ‘블록체인 플랫폼(L1/L2), 거래소·지갑·커스터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디파이(DEX·대출·파생상품), DAO(탈중앙화 자율조직), NFT·게임, 실물자산 토큰화(RWA)·토큰 증권’까지 가상자산 시장 전반이 실험 대상이다.

최근 수년 동안 미국은 강경 규제로 인해 Web3 기업들이 친 암호화폐 국가인 싱가포르·두바이·스위스로 이동하는 흐름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정책 변화는 분명한 신호다. 미국에서 다시 혁신의 바람이 불게 하겠다는 의지다. 여기에는 전략적 의도가 있다. AI·블록체인·금융 인프라가 결합하는 미래 경제에서 미국이 기술·자본·규제의 삼박자를 모두 주도하려는 계획이다.

이번 변화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미국이 디지털 자산 산업을 ‘규제 대상’에서 ‘성장 산업’으로 격상시키는 신호다. ETF가 시장을 움직였다면, ‘프로젝트 크립토’와 ‘혁신 면제’는 가상자산 산업 전체의 방향을 움직인다. 앞으로 디지털 자산 시장의 중심이 미국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잠깐용어 *스테이블코인 | 문자 그대로 가격이 안정적(Stable)으로 유지될 수 있게 설계된 가상자산(Coin)이다. 달러 등 특정 자산에 연동돼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게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스테이블코인은 담보 종류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① 법정화폐 준거형이다. 달러나 미국채, 유로, 엔화처럼 법정화폐에 가치가 고정된 형태다. 테더와 서클이 여기 속한다. ② 상품 준거형이다. 금이나 은, 석유 등 원자재·실물자산을 담보로 하는 구조다. ③ 가상자산 담보형이다. 다른 가상자산과 가치를 연동한다.

잠깐용어 *탈중앙화 금융(DeFi) |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명목 화폐의 독점적인 역할에 도전하며, 은행 같은 중간 기관 없이 대출·예치·투자 등이 가능한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홍익희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0호 (2025.12.24~12.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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