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의 공포영화, 40년 만에 재평가된 이유
[고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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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컷 |
| ⓒ 샤이닝 |
이것은 멍청한 놀래킴이나 싸구려 속임수로 만들어진 공포 영화가 아니다. 큐브릭의 영화는 TV가 어두워진 후에도 오랫동안 여러분 곁에 머물러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짐승이다(This is not a horror movie made of boo scares or cheap tricks, Kubrick's film is a lurking, dangerous beast that stays with you long after your TV has gone dark.)."
할리우드 흥행 역사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짐승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70년대는 공포 영화의 시대였다. 1973년 <엑소시스트>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역사에 남을 공포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토탈필름에서도 상위 10편 중 무려 절반이 70년대 작품이다(<엑소시스트>,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할로윈>, <죠스>, <에일리언>). 1980년 개봉한 <샤이닝>은 공포 영화 흥행 막차에 올라탄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전작 <배리 린든>이 아쉬운 흥행성적에 이를 간 큐브릭 감독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원작은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작품. 스타와 작업을 기피하던 큐브릭 감독이지만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한 잭 니콜슨, 로버트 알트만의 <세 여자>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셜리 듀발의 캐스팅으로 흥행의 고삐도 바짝 죄었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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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이닝 |
그렇게 40년이 흐른 지금. 평단의 평가는 극적으로 변한다. 영화가 느린 게 아니라 최면적이라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 중에 단연 최고작이라고. 토탈필름과 함께 역대 최고의 공포 영화로 <샤이닝>을 선정한 엠파이어 지의 평가는 명작이 꼭 당대에 인정받지 않는다는 고백이자 반성이기도 하다.
"약간 뒤늦은 깨달음은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큐브릭의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친절했고, 이제 <샤이닝>이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는 것은 눈이 부시게 명백해 보인다: 정확하고, 꼼꼼하고, 초현실적이고, 시각적으로 놀라우며 광기로 하강하는 것에 대한 빛나는 연구다. 최고의 공포 영화다. (What a difference a bit of hindsight makes. As with a lot of Kubrick's work, time has been kind, and it now seems blindingly obvious that The Shining is a masterpiece without parallel: precise, meticulous, surreal, visually astonishing, a shimmering study of a descent into madness. The ultimate horror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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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이닝 |
위험한 짐승은 골격부터 탄탄하다. '영상 언어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치밀한 촬영, 음악, 편집을 통해 초능력과 사후세계가 난무하는 초현실적인 공간에 납득될 수밖에 없는 현실감을 부여한다. 트랙킹숏으로 대니의 자전거를 흔들림 없이 뒤쫓는 스테디 카메라는 마치 오버룩 호텔에 머무는 원혼의 시선처럼 보인다. <록키>에서 처음으로 사용됐지만, 영화의 주제와 밀착하며 스테디 카메라가 서사적 기능으로 100% 활용된 건 <샤이닝>을 최초로 본다.
영화는 평범한 구직 인터뷰로 시작하는 현실적인 시퀀스로 출발해 초능력자와 귀신이 출몰하는 초현실로 끝난다. 하지만 이질적일 수 있는 현실과 초현실의 접합을 지적하기는 힘들다. 로키산맥 어딘가에, 지금도 12월부터 5월까지 눈이 쌓이면 고립되고 마는 호텔이 존재하는 것 같은 완벽한 미장센에 서사까지 매끈하게 이어붙인 큐브릭의 연출력 덕이다. 달착륙 조작설의 총감독이 큐브릭이었다는 루머가 지금도 유효한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컷 편집은 엄청난 특수효과 없이도 미쳐가는 잭과 오버룩 호텔의 초현실적인 에너지를 새긴다. 특히 호텔 로비에서 정원에 설치된 미로의 미니어처를 바라보는 잭, 미로에 갇힌 웬디와 대니를 조망하는 부감샷을 연이어 배치해 마치 잭이 웬디와 대니를 조종하는 것 같이 효과를 내는 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허공에 치솟은 뼈도끼가 우주선으로 변하는 시퀀스만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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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이닝 |
점차 미쳐가는 잭은 골드볼룸(Gold bowl room)에서 바텐더 로이드를 만난다. 유령처럼 핏기없는 바텐더는 술을 끊은 잭에게 위스키를 따라준다. 위스키를 더블샷으로 마신 잭은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백인의 책무를 강조한다. 이후 화장실에서 잭은 오버룩 호텔의 전임 관리자이자 아내와 딸들을 토막살인한 그레디를 만난다. 그레디는 Nigger라는 멸칭을 쓰며 흑인이 호텔로 침입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역시 샤이닝을 가진 할로렌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눈밭을 달릴 수 있는 스노우캣을 끌고 호텔로 오는 중이었다. 백인의 책무를 다하겠다던 잭은 결국 흑인의 가슴팍을 도끼로 내려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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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이닝 |
당시 유명한 공포소설을 모두 읽었다는 큐브릭이 스티븐 킹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성에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부분을 포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서사는 큐브릭이 일관적으로 탐구해온 통제 불능과 텅 빈 내면이라는 주제와도 공명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는 각각 통제 불능의 핵무기, 인공지능, 인간성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비극을 보여준다. <롤리타>, <배리 린든>, <아이즈 와이드 셧>은 각각 금기된 사랑, 급격한 신분 상승에서 오는 불안함,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으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내면과 마주하며 망가져 가는 주인공들의 파멸을 다룬다.
<샤이닝>에서 문제 있는 인간성은 '흔적'으로 나타나고 곧 공포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호텔이 영업을 마치기 전, 잭의 가족들은 지배인인 올만에게 호텔에 대한 설명을 듣던 중 총주방장인 할로렌을 만난다. 할로렌은 대니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며 초능력인 '샤이닝'을 설명하고 237호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며 경고를 한다. 대니는 237호에 무엇이 있냐고 묻고 할로렌은 아무것도 없지만 들어가지 말라며 이런 대사를 한다.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로 인해서 어떤 흔적이 남게 된단다. 그런데 그 어떤 흔적이 또 다른 나쁜 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영화에서는 웬디가, 영화밖에서는 관객이 마주하는 <샤이닝>의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도끼 살인도 아니고 미로 속 추적도 아닌 누런 종이 위에 끝없이 타이핑된 문장이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바보가 된다)는 잭의 모든 문제를 함축한다. <샤이닝>의 잭은 호텔을 통제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있는 안정적이고 편한 '현재'의 일자리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미래'에 명성을 떨칠 괜찮은 글을 쓰지 못하는 텅 빈 내면과도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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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이닝 |
그렇다면 우리는 위험한 짐승에게 사로잡혀 영원히 공포에 떨어야 할까. 성악설에 가깝고 염세적인 큐브릭 감독이지만 <샤이닝>에서만큼은 우리를 영원한 공포에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것 같다. 최후의 추격전에서 잭과 대니는 발목까지 눈이 쌓인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긴박한 추격전의 결과. 대니는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와 웬디와 스노우캣을 타고 호텔을 탈출한다. 잭은 미로 속에서 동사한 채 아침을 맞이한다.
이런 결과를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흔적에 대한 대응이다. 잭에게 언제 붙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절체절명의 순간. 잭은 대니의 흔적인 발자국만 따라가지만, 대니는 자신의 흔적인 발자국을 지운다. 우리에게도 선택이 남았다. 과거의 흔적만 쫓다가 황금시대에 박제된 냉동인간이 될 것인가, 과거의 나쁜 흔적들을 지우고 미로를 빠져나가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이제 곧 눈 내리는 계절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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