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300조 시대, 창작자 안전망이 필요하다

양현미 2025. 12. 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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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사례에서 배우는 예술노동 가치 인정과 지속가능한 창작 환경

[양현미]

ⓒ 넷플릭스
2026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이 7.8조 원으로 확정되었다. 전년 대비 전체 예산은 11.2% 증가했으며, 콘텐츠 부문은 무려 27%나 증액되었다. 이는 K-콘텐츠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K-컬처 300조 시대'를 열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콘텐츠 산업을 미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주목하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투자 확대는 예술인의 일자리 창출과 창작 기회 확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콘텐츠 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10억 원 당 14명으로 전체 산업 평균을 크게 상회한다. 또한 종사자의 70% 이상이 20~30대 청년층인 젊은 산업이기도 하다. 이번 증액은 고용 없는 성장 시대의 대안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려를 지울 수 없다. 화려한 산업적 수치 뒤에는 여전히 불안정한 창작자들의 삶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 부문에서 취업유발계수가 높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단기 프로젝트성 고용'이 많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4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업 예술인의 61.7%, 겸업 예술인의 53.6%가 프리랜서 경험이 있다. 특히 방송연예, 대중음악, 만화, 영화 등 주요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그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처럼 고용 불안정성이 높은 구조에서 사회적 안전망 없는 단순 예산 투입은 자칫 '나쁜 일자리'만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K-콘텐츠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산업적 투자와 함께 창작자 보호를 위한 안전망이 패키지로 묶여야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 N잡러가 된 청년 예술인들

대중은 미디어에 비친 성공한 스타들의 모습만 기억한다. 하지만 소수의 스타를 제외한 대다수 예술인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전업 예술인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생계를 위해 예술 외 활동을 병행하는 겸업 예술인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청년층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다.

우리는 종종 성공한 예술가들이 과거에 겪었던 생활고를 '낭만적인 일화'로 소비하곤 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 그 시간은 창작의 의지를 꺾는 가혹한 생존의 시간일 뿐이다.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배달 노동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세계를 감동시킬 창작물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예술인 고용보험'을 도입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를 신설했으며, 서면계약 의무화와 표준계약서 보급을 통해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예술인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직업인의 지위를 보장하려 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촘촘한 예술인 복지, 금융 안전망을 넘어 소득 안전망으로

그렇다면 현 정부의 예술인 정책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관련 국정과제는 '촘촘한 예술인 복지 지원'이다. '예술인 복지 금고' 조성이 신규 과제로 설정되었고,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료 지원과 주거·돌봄 등 생활 서비스 확대, 청년예술인 적립계좌 등 기존 제도의 강화가 함께 추진되고 있다.

복지 분야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전 국민 산재보험 당연가입'도 주목할 만하다. 쉽진 않겠지만, 예술인에게도 적용되어 현재 23.5%에 불과한 예술인 산재보험 가입률을 끌어올리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길 기대한다.

'예술인 복지 금고'는 예술인 생활안정자금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다양한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불규칙한 소득으로 인해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예술인들에게 이 제도는 당장의 생계를 잇게 해주는 소중한 마중물이다. 정부는 이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재원 확충과 운영 내실화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하지만 금융 지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어도, 창작 활동을 지속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소득 안전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러 차례 '예술인 기본소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 의제는 정책 테이블에서 사라졌다. 예술인 기본소득과 유사해 보이는 지원사업이 몇 개 있다. 정부의 '예술활동준비금'과 경기도의 '예술인 기회소득'이다.

하지만 성격이 다르다. 현재 시행 중인 '예술활동준비금'은 기준중위소득 120% 이내라는 엄격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며, 프리랜서가 일을 쉬는 동안 지원하는 긴급 복지의 성격이 짙다. 경기도의 '예술인 기회소득'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는 '창작 수당'으로서 의미 있는 시도다. 하지만 연 150만 원(월 환산 12만 5천 원)의 지원액은 생계의 불안정성까지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일랜드의 담대한 실험, '퍼주기'가 아닌 '투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일랜드의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2022년부터 3년간 예술인 2,000명을 무작위로 추첨해 매주 325유로(월 약 200만 원)를 지급하는 '예술인 기본소득(Basic Income for the Arts, BIA)'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지급액은 시간당 최저임금에 주당 평균 노동시간을 곱해 산출했다. 예술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사회적 임금을 지급한 것이다. 인구 544만 명인 아일랜드에서 2,000명은 한국으로 치면 약 2만 명에 해당하는 규모다. 파급력은 컸다.

최근 발간된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소득을 받은 예술인들은 비교군보다 창작 시간이 유의미하게 늘었고, 생계를 위한 부업 시간은 줄었다. 예술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증가한 것이다. 비용편익 분석 결과, 투입된 예산 1유로당 1.39유로의 사회적 편익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아일랜드 정부는 2026년부터 이 제도를 정규 사업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2026년 상반기에 구체적인 기준이 나오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술인 기본소득을 단순한 '복지'가 아닌 국가 문화 역량을 키우는 '투자'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예술인 사회안전망, 문화강국의 필수 인프라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아일랜드는 1인당 GDP가 10만 달러가 넘는 부자 나라니 가능한 것 아니냐고. 이는 통계의 착시다. 다국적 기업의 효과를 제외한 아일랜드의 실질적인 국민소득 지표인 GNI를 살펴보면, 한국과의 격차는 2배 미만으로 줄어든다. 결국 이것은 경제력의 차이가 아니라, 예술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적 합의의 차이다.

정부가 K-콘텐츠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천명한 지금이야말로,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진 창작자들의 삶을 돌아봐야 할 적기다. 단순히 예산을 늘려 단기 일자리를 만드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물론 예술인 기본소득이 실현되기까지 거쳐야 할 사회적 합의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재정적 한계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이 농촌의 소멸을 막기 위한 절박한 대안으로 논의되듯, 예술인 기본소득 또한 문화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인프라로서, 이제는 그 논의의 첫발을 떼어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가 유네스코의 <예술인의 지위에 관한 권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산업은 인적 자본의 창의성이 핵심인 산업이다. 예술노동의 불안정성이 창의성을 잠식하지 않도록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이 맞물려 설계되어야 한다. 긴급지원을 받기 위해 가난을 증명해야만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제2의 봉준호나 BTS가 지속해서 나오기는 어렵다.

예술인의 생존을 개인의 위태로운 투쟁에 맡겨두지 않고, 국가가 그들의 시간을 보호하고 투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 양현미 상명대 교수
ⓒ 포럼 사의재
* 필자 소개 : 양현미 교수는 현재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문화예술경영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문화비서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 서울특별시 문화기획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산업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정책의 이론과 현장을 아우르는 전문가로 최근 <AI와 문화정책>(2025), <한국 문화정책의 이해 : 이론, 역사, 실천>(공저, 2024)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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