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동물, 식물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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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태 시인이 펴낸 네 번째 시집 <시로 쓴 생물도감> (푸른사상 간)에 실려 있다. 시로>
경남 거제에서 '노자산 지키기'를 비롯해 생태활동가로 지내는 그가 "새와 동물, 식물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시"들을 쓴 것이다.
시집은 '새', '동물', '식물', '인간'의 4부로 나눠 시들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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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효 기자]
달팽이 성자
달팽이가 성자에 가까운 것은 / 꼭 느린 동물이어서가 아니다 / 가장 낮은 곳으로 기어다니며 / 가장 낮은 음으로 울기 때문만도 아니다 / 달팽이는 길이 막히면 달집에 몸을 말아 넣고 생각에 잠기는데 / 그 생각이 깊고 오래간다 / 아무리 기다려도 쉽게 입술을 꺼내지 않는다 / 겨울은 더욱 생각하는 시간이다 / 돌 속에 들어가 면벽수도 하는데 / 돌이 봄비에 잠겨서야 겨우 가부좌를 푼다 / 사람들은 흔히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알 뿐이다 / 햇볕으로 주변이 소란하면 또 말문을 닫고 / 달궁에 몸을 말아 넣고 궁리에 빠지는데 / 사람들은 여름잠을 잔다고 한다 / 네 개의 눈은 바깥보다는 내면을 향한다 /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눈을 넣어 /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이다 / 무언가 눈에 닿았을 때 그것을 살피기 위해 눈을 크게 뜨는 것이 아니라 / 자신 속으로 눈을 밀어 넣는다 / 이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 되도록 가깝거나 먼 곳을 보지 않음으로써 / 관심의 고통으로부터 멀어지는 법을 안다 / 근육과 뼈는 부드럽고 물렁물렁하여 / 남을 다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다치지 않는다
원종태 시인이 펴낸 네 번째 시집 <시로 쓴 생물도감>(푸른사상 간)에 실려 있다. 경남 거제에서 '노자산 지키기'를 비롯해 생태활동가로 지내는 그가 "새와 동물, 식물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시"들을 쓴 것이다.
시인이 만난 생물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생물도감'이라 할 만한 시집으로 자연을 향한 시인의 언어는 성숙하고 시 세계는 불경의 구절처럼 넓고도 깊다.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목소리를 담아낸 시집이다.
시집은 '새', '동물', '식물', '인간'의 4부로 나눠 시들을 묶었다.
김하기 소설가는 해설에서 "자연과 인간을 서로 성찰하는 거울로 삼고, 새와 동물, 식물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여 갓 잡아 올린 은어와 같이 싱싱한 존재로 건져 올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집은 느림의 기록이자, 존재가 말을 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한 시인의 집중된 귀의 역사"라면서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자연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이 담겨 있다"고 전했다.
원 시인은 1994년 <지평의 문학>에 "향우회" 등 시를 게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그동안 시집 <풀꽃 경배>, <빗방울 화석>, <멸종위기종>을 펴냈다.
한국작가회의, 경남작가회 회원이기도 한 원 시인은 거제에서 작은책방과 생태연구소를 운영하며, 생태계 보존운동을 하고 있다.
시 몇 편을 읽어보자.
작은 도서관
책을 넣었는데 새가 나온다
딱새 부부가 작은도서관 도서반납함에 둥지를 틀었다
책 한 권이 들어갈 구멍은 새가 나드는 문
암컷은 알을 품고 수컷은 계속 밥을 나른다
딱새는 삼천지교를 꿈꾸는가
인간의 눈으로는 딱한 새일 뿐인데
위태한 곳이 안전한 곳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이
고양이 까마귀 같은 천적들로부터 지켜주리라
가느다란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차라리 모르는 것이 도와주는 것
무심함이 새를 잘 키울 수도 있다
딱새 부부는 느슨한 도서반납함 어깨 위로 빠르게 나든다
알이 깨어났는지 부부가 교대로 쉴 새 없이 먹이를 나른다
사서는 산딸나무 꽃잎 같은 방을 붙였다
이 곳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어요
아이들이 커서 날아갈 때까지
도서반납일을 연기합니다
동박새 한 마리가 지구를 멈춘다
출근길이었는데 차들이 멈춘다 갑자기
막 둥지를 벗어난 노란 주둥이 한 점
도로 황색 중앙선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파르르 눌어붙어서 떨고 있다
도롯가에서는 엄마 새가 동동
찍찍 힘을 내라고 울어 쌓는데
근처 밭에는 투명한 그물이 날개를 펴고
산기슭에는 길냥이 밥그릇이 입을 벌리고
세상은 참 험하다
차들은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서 잠깐 멈춰서는
동박새 새끼를 응원한다
엄마한테 가라 어서 숲으로 가라
엄마가 기다린다 엄마가 울고 있다
집으로 가라
손 한 모금 크기밖에 되지 않는 동박새
얄궂은 새 한 마리가 가끔은
지구를 멈추기도 한다
가라산 코끼리 바위
거제도 가라산 능선에 코끼리 바위 하나
금세 코를 들어 올릴 것 같은 자세로
암릉에서 앞발이 걸어나오다 잠깐 멈춰서 있다
뜨거웠던 시절 푸른 초원이었던 소금 바다를 보고 있다
형상과 크기가 비슷하여 코끼리 등신불로 불린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서 있기만 하는데
인간들의 순례는 끝이 없다
이곳에서는 사방에 모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헛디딜 일도 없다
움직임이 없으니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므로 누구와도 다툴 일이 없어 보인다
안개와 먼지를 불러 모아 이끼들을 먹이고
천 개의 부처손과 일엽초 같은 족속들에게 옆구리와 발목
을 내어준다
바다가 초원이었을 때의 언어를 사용하므로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
하루에 십만 번 뛰는 인간의 심장으로는
바위의 숨소리도 맥박도 느낄 수 없다
십만 년에 한 번 숨을 내뱉는 코끼리의 설법을 어떻게 알
아들을 수 있겠는가
기다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소금 바다가 초원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바위 속에 시간을 삼키고 시간의 주인이 된 자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두려운 게 없다
코끼리 한 마리 납빛 바위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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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태 시인 시집 <시로 쓴 생물도감>. |
| ⓒ 푸른사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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