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경 주연 '여행과 나날', 뜯어볼수록 경이롭다
[김상목 기자]
'이'는 자신의 각본으로 제작된 신작 개봉 후 정체기에 빠진 상태다. 딱히 작품 평판이 나쁜 것도 아닌데, 그는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자조한다. 보다 못한 주변 지인들은 그에게 여행을 떠나 휴식을 취하도록 권유한다. 오랜만에 출발한 여정인데도 뚜렷한 계획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기차를 타고 눈 덮힌 북쪽으로 향한다.
열차에서 내린 그는 설국의 펼쳐진 작은 마을에 닿는다. 거리를 산책하다 어느새 짧아진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급히 숙소를 알아본다. 하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다. 마음이 다급한 '이'는 관광 지도엔 나오지도 않는 깊은 산중 여관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캄캄해지기 직전에 여관에 도착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
다행히 인기척이 들린다. 여관 주인 '벤조'는 예약도 없이 찾아온 '이'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하지만, 다행히 내쫓지는 않는다. 여관 주인은 툴툴대면서도 기본 접대는 충실히 수행한다. 저녁을 먹고 달리 할 일도 없는 주인과 손님은 이것저것 이야기로 소일한다. 해가 지자 폭설이 내리고, 하얗게 뒤덮인 설국에서 어색한 하룻밤을 보낼 참에 여관 주인은 뜬금없는 제안을 건네고, 그를 따라 나선 '이'는 잊지 못할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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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과 나날> 스틸 |
| ⓒ 엣나인필름 |
하지만 그런 감독의 신작은 앞선 작품들과는 미묘한 결의 차이를 드러낸다. 도시의 그늘 속 검푸른 색채로 각인되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이번 영화는 도시를 벗어나 기존의 배경과 확연히 다른 풍광으로 향한다. 그것도 마치 2편의 중편을 연결한 듯 극 중 극 구조로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벗어나는 실험을 선보였다. 작가적 야심이 진하게 묻어난다. 파격이라 해도 좋을 법하다.
<여행과 상상>을 보게 된 관객은 감독이 화면에 펼치는 이야기를 팔짱 끼고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 아니다. 맥락을 추리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한편, 형언할 순 없더라도 무한히 매혹적인 풍경으로 들어가듯 매료된다. 이건 숫제 관객 각자가 주인공 바로 곁에서 구경꾼을 넘어 동행하며 실시간 모종의 '체험' 행위자로 참여하는 격이다. 편안한 좌석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대충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겠지? 같은 선입견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 처하면, 종종 관객은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거나 난감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다. 상업영화 블록버스터를 찾은 관객이라면 짜증도 낼 법하다. 하지만 예정된 대가를 등가교환처럼 기대하지 않고, 영화를 통해 낯선 세계, 새로운 체험과 만나길 두려워 않는 독립예술영화 관객이라면 이 미지의 영화는 극한의 영화적 체험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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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과 나날> 스틸 |
| ⓒ 엣나인필름 |
영화는 그런 주인공의 각오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듯하다. '이'가 각본 작업에 참여한 작품은 축약된 형태로 화면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여름의 낯선 해변에 들어선 젊은 남녀는 무료와 권태로 점철된 휴가에서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 진입한 것 같은 체험으로 향한다. 마치 비밀의 문처럼 어두운 해안 동굴을 지나야만 도달 가능한 숨겨진 만은 그들에게 호기심과 활기로 다가온다. 낯선 만남은 묘한 끌림으로, 평소와 다른 감각으로 둘을 이끈다. 그들은 그렇게 도시의 번잡도, 시골의 지루함도 넘어선다. 작렬하던 여름 햇살부터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격렬한 파도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도시에서 온 두 사람에게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변화구를 던진다.
하지만 '이'에겐 여전히 스스로 동의하기 어려운 정체감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근작 각본과는 정반대의 형세로 자석에 이끌리듯 향한다. 그가 탄 완행열차는 자신이 집필한 근작 시나리오 속 남녀가 향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치 세상 끝에 있는 것처럼 고즈넉하고 외부와 단절된 설국 마을에 닿는다. 평범한 작은 관광지로 조성된 마을을 건너뛰고 전설의 고향 속 무대와도 같은 깊은 산속 외딴 여관으로 발걸음을 딛는다. 평범한 여정처럼 보여도 이미 그의 행보를 지켜본 관객이라면 이제 어떤 우연적 사건이 닥칠지 침을 꿀떡 삼킬 법하다.
그렇게 지금껏 자신이 속하던 세계에서 홀연히 벗어난 듯 초연한 여관 주인과 대면한다. 그와의 하룻밤은 모든 게 예측 가능한 조건과 동떨어져 있다. 평범한 일상 대화와 접객이 이뤄지듯 보일지언정, 오가는 말과 그들이 함께 벌이는 작은 소란은 무엇이건 익숙한 일상을 때론 뜬금없게, 혹은 미묘하게 빗겨난다. 이게 한두 번 거듭되면 우연이라 하겠지만, 지속적으로 비틀어대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 모든 게 의도된 연출이라는 걸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진 않는다. 관객 각자가 주인공의 자리에 본인을 설정하고, 여관 주인과 주인공 옆에서 혹은 내가 주인공을 대신해 객체가 아닌 주체적 행위자로 설정된 설계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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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과 나날> 스틸 |
| ⓒ 엣나인필름 |
감독의 전작들은 도시의 야경을 떠올리게 하는 캔버스 속에서 작은 빛을 내는 별들을 포착하듯 구석의 군상들을 그려왔다. 현대 사회의 우울 속에서도 소박한 의지와 시련의 극복에 도전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촘촘한 문학적 구성에서 비교적 자유도 있는 연출을 선보여 오긴 했지만, 일정한 방향으로 예정된 궤적을 그렸다. 그러나 변화를 도모한 신작에선 그런 순방향 궤도로의 전진보다 낯선 세계로의 진입 자체에 방점을 두는 형세다. 기본 가이드 말고는 관객까지 자유여행에 도전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는 감독의 비전과 연출이 집약된 구성에서 벗어나 마치 게임 속 주인공으로 관객을 설정하고 운영을 맡기는 듯하다. 감독은 그저 주역들을 비밀의 해안과 설국의 눈밭으로 손을 잡아 이끌고,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객의 자리를 유도한다. 그리고 제목 그대로 관객 각자가 '여행'할 기회를 보장받도록 어두컴컴한 극장 내부를 적극 활용한다. 실로 전방위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대개 당연시하는 해변과 설원 등장 장면의 와이드 스크린 대신, 답답해 보일 정도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비율을 과감히 도입한다. 카메라를 거쳐 이중 삼중으로 누수 혹은 왜곡되지 않고 마치 개별 관객이 직접 화면 속 감독이 창조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곧 관객이 직접 화면 안에서 주변 환경을 응시하는 효과를 전면 구현한 셈이다. 음악 역시 묘하게 청각을 끌되, 자연스럽게 주변에 귀를 쫑긋 세우도록 배치된다. 제작 의도에 오감을 총망라해 선택과 집중을 감행한 셈이다. 본인의 작품 연보를 통해서도 과감한 도전을 통해, 비로소 (영화 속 '이'가 소망하던 것처럼) 미야케 쇼 역시 익숙한 '언어와의 결별'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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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과 나날> 스틸 |
| ⓒ 엣나인필름 |
<여행과 나날>은 뜯어보면 볼수록 경탄이 앞선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세계 누구나 꿈꾸는 여행을 통한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 혹은 새로운 삶의 희구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여행이 갖는 본질적 열망을 영화라는 대중예술을 통해 극대화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배우라는 조건까지 설정 일부로 활용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뻔하게 이해 가능한 요소가 드물지만, 불안보다는 뭐든 감행하고픈 충동과 흥분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여정은 고스란히 그가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글 감옥의 무의식에서 신선한 생동으로의 탈주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렇게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영화와 그 안의 또 다른 영화, 이를 응시하는 관객 사이에서 일종의 '삼체' 운동을 계속한다. 영화예술의 미래를 조망하고 실증하려는 어떤 '첨단'의 시도가 궁금하다면 미야케 쇼의 신작을 목격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자.
<작품정보>
여행과 나날
旅と日々
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일본|드라마
2025.12.10. 개봉|89분|12세 관람가
감독 미야케 쇼
출연 심은경, 츠츠미 신이치, 카와이 유미, 타카다 만사쿠
원작 츠게 요시하루 『해변의 서경』 • 『혼야라동의 벤상』
수입 엣나인필름, humanité Co., Ltd
배급 엣나인필름
2025 78회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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