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해도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 노무현의 FTA 결단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59>]

2025. 12. 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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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59> 자유무역협정(FTA)


한·미 FTA 추진 당시 광장은 찬성(아래쪽)과 반대 시위로 가득 찼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층의 반대에도 FTA를 강행했다. 노 대통령은 “개방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개방하지 않고 성공한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현재 59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우리나라가 한때는 FTA 낙제생이었다는 사실을.

2003년 봄, 세계무역기구(WTO) 146개 회원국 가운데 FTA를 하나도 맺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몽골뿐이었다. 한국은 2000년대 초까지도 ‘다자무역체제 절대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WTO와 같은 다자체제는 전 세계가 동일한 규범을 만들어 준수하는 이상적인 구조지만, 회원국 간에 이해관계가 복잡해 합의가 지연되면서 규칙을 만들지 못한 채 소득 없이 흘러갔다.

그 사이 세계는 이미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1994년 미국·캐나다·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출범하자 주요국은 앞다퉈 FTA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한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WTO 중심 전략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었다. FTA를 맺어 관세 없이 무역하는 나라들에 수출 시장을 빼앗길 수 있어서였다. 이 위기감이 바로, 한국 통상이 다자주의에서 FTA 중심으로 방향을 튼 결정적 계기(트리거)가 됐다. 그 전략 전환의 정점에 한·미 FTA가 있었다.

칠레와의 협상서 자신감 얻고 미국으로
2003년 8월, 정부는 ‘동시다발적 FTA 로드맵’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최대한 위험이 적은 국가와 협상을 벌여 학습 효과를 쌓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유럽연합(EU)·중국 같은 거대 경제권과 협상한다는 구상이었다.

2003년 2월 칠레와의 제1호 FTA에 서명하는 모습. [중앙포토]

첫 파트너는 칠레였다. 거리가 멀어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과 남반구 국가라 계절이 반대여서 농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점 등 실용적 이유도 있었지만, FTA 경험이 많은 칠레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판단도 있었다.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는 ‘우리도 이제 FTA 협상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곧장 대형 협상으로 움직였다. 2006년 2월 세계 최대 선진 경제권인 미국과의 FTA 협상을 선언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더 큰 시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FTA를 “위험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이라고 했다. 청와대 내부 보고에서도 우려와 반대가 잇따랐지만, 노 대통령은 “이 길을 열어야 다음 세대가 간다.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는 타이밍을 놓친다”며 밀어붙였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상이 아니라 대전환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의 경제 정책, 산업 구조와 제도를 선진국형으로 바꾸는 계기였다.

협상은 시작부터 난도가 높았다. 서비스·투자·지식재산권·정부조달·경쟁정책·비관세장벽 등 한국 경제 시스템을 통째로 다루는 ‘초광범위·초고난도’ 협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미 FTA는 국내 정치·사회·경제 전 영역을 흔들었다. 14개월 동안 여덟 차례 공식 협상을 진행했지만, 실제 더 큰 전쟁은 협상장 밖에서 벌어졌다. 쇠고기·자동차·의약품·스크린쿼터 등 거의 모든 분야가 국민적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전국에서 수십 차례 공청회가 열렸고 찬반 집회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역사상 통상정책이 이처럼 정치의 중심에 선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식 회의장에서의 협상 또한 유례없이 치열했다. 양측 수석대표였던 한국의 김종훈과 미국 무역대표부(USTR) 웬디 커틀러는 ‘검투사’로 불릴 만큼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문구 하나, 숫자 하나를 두고 밤샘 논쟁을 반복했다.

2007년 4월 2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캐런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가 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4월 2일 한·미 FTA는 타결됐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비준이라는 또 다른 산이 남아 있었다. 한국 내부는 정치·사회적 갈등이 더 뜨거워졌다. 노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FTA는 정치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먹고사는 문제”라며 국가경쟁력 차원의 결단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2008년 광우병 논란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대규모 촛불시위는 한·미 FTA 찬반과 맞물리며 한국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미국에서도 자동차·쇠고기·섬유 업계 등을 중심으로 반대가 강했고,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의회 내 반발도 거셌다.

2010년 포드자동차가 미국 신문에 낸 한·미 FTA 반대 광고. 한국이 수입차 시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 벌인, 전례 없는 규모의 ‘찾아가는 설명회(아웃리치)’ 활동이 상황을 바꿨다. 워싱턴DC에서 의원과 보좌관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미국은 정당 공천이 아니라 예비선거를 통해 의원 입후보자를 선출한다. 그만큼 지역구민의 힘이 세다. 그래서 한·미 FTA 비준에 찬성할 의원을 충분히 확보하려면 지역구 유권자를 설득해야 했다.

당시 미국에는 미국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업종 단체와 기업이 참여한 ‘한·미 FTA 지지 연합체’가 꾸려져 있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이들과 함께 팀을 결성해 주요 의원들의 지역구 수백 곳을 직접 찾아다녔다. 소상공인과 유권자들에게 FTA가 미국에도 왜 필요한지, 한국과의 경제 동맹이 전략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설명했다. 지역별로 한국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효과를 보여주는 통계를 담은 소책자도 맞춤형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선거운동에 가까운 외교전이었다. 그래서 “한·미 FTA는 미국 국민을 설득해 통과시킨 거의 유일한 FTA였다. 이것이 한·미 FTA의 독특한 역사”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한·미 FTA 자극받은 EU, “우리와도 하자”
한편에서 미국보다 늦게 시작한 한·EU FTA가 2011년 7월 1일 잠정 발효됐다. 그러자 한·미 FTA 비준을 촉구하는 미국 업계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사실 EU는 2004년만 해도 우리가 FTA를 제안했을 때 “관심 없다”며 거부했던 상대다. 그러다 한국이 미국과 FTA를 추진한다는 소식에 제 발로 찾아와서는 먼저 발효시킨 것이다.

2011년 10월 미국 의회에서, 그리고 다음 달 한국 국회에서 FTA가 비준됐다. 이듬해 3월 15일 마침내 한·미 FTA가 공식 발효됐다. 2006년 6월 협상을 시작하고 5년9개월 만이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미국과 FTA를 체결한 첫 국가가 됐다.

FTA 발효 후 한국 경제는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말해 준다. 다음은 2022년 대외경제연구원이 분석한, 한·미 FTA 10년간의 성과다.

▶대미 수출 증가율: 연평균 5.5%(전체 수출 증가율 1.5%의 약 3배)

▶투자 : 한국의 대미 투자는 연평균 266%, 미국의 대한 투자는 315% 증가

제조업·서비스·지식재산권·경쟁정책 등에서 국제 규범 기반의 제도 선진화도 가속화했다. 한·미 FTA가 단순한 관세 철폐 조약이 아니라 ‘한국 경제 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개조한 제도적 빅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2018년 한·미 정상이 FTA 개정안 관련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러나 2018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는 FTA의 안정성을 흔들었다. 재협상 끝에 협정은 유지됐지만, 올해 발표된 ‘양국 관세 및 투자 협상’ 결과는 기존 FTA가 보장하던 무관세 혜택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관세 장벽을 세웠다. 이는 한·미 FTA 무력화 논쟁을 부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한·미 FTA가 법적·제도적 틀로 여전히 살아 있고, 소통 채널로써 활용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정을 넘어 급변하는 통상질서를 조율하고 한국의 전략을 설계하는 핵심 기준점이 됐다.

한국은 지금 세계 6위 수출국이자 8위 무역국이며, 연구개발에서부터 부품·소재와 제품 생산, 유통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의 핵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 성취의 출발점에는 2000년대 초 한국이 느꼈던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 그리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 있었다.

2025년 새로운 통상 충격의 복판에 서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결단의 순간과 마주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 공급망 재편,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 등 기술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FTA가 남긴 개방 정신과 수준 높은 규범을 미래 전략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한·미 FTA는 한국을 선진국 체제로 이동시킨 결정적 트리거였다. 우리는 지금 또 다른 트리거를 당겨야 할 시간에 서 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헌법과 시대정신’ 편입니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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