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성은 그대로인데”…배우 이름값에 널뛰는 흥행, 韓 뮤지컬의 민낯

박정선 2025. 12. 5. 11: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데스노트’가 김성철, 규현의 합류 이후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뒤늦은 흥행 가도에 올랐다. 수치상으로는 성공적인 흐름이지만, 이 현상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에는 씁쓸함이 묻어난다. 이들의 합류 직전까지 겪었던 ‘흥행 고전’이 한국 뮤지컬 시장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디컴퍼니

동일한 프로덕션, 동일한 연출임에도 배우의 이름값에 따라 티켓 판매 추이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현상은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이 작품의 본질적 가치보다 캐스팅에 얼마나 기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민낯인 셈이다.

앞선 시즌에서 ‘데스노트’는 홍광호, 김준수 등 소위 ‘티켓 파워 1군’으로 분류되는 배우들이 출연하면서 예매 전쟁을 치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 ‘데스노트’ 시즌 초반 라인업은 라이토 역에 조형균·김민석·임규형, 엘(L) 역에 김성규·산들·탕준상 등 뉴페이스로 꾸려지면서 흥행 속도가 현저히 더딘 모습이다.

그렇다고 배우들의 역량이 특별하게 부족한 것도 아니다. ‘데스노트’에서는 새로운 얼굴이지만 이들 역시 뮤지컬계에서 이미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이고, 아이돌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뮤지컬 무대 경험이 풍부하다. 작품 역시 화려한 LED 연출과 프랭크 와일드혼의 드라마틱한 넘버, 치밀한 심리 게임이라는 작품의 ‘물리적 퀄리티’는 전 시즌과 동일했다.

그러나 주말 황금 시간대에도 잔여석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광경이 목격되면서, 압도적 티켓 파워를 가진 특정 스타가 부재하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저평가되는 현실이 씁쓸함을 안긴다. 실제로 이들 공연이 입소문을 타면서 후반부엔 좌석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앞선 ‘전 회차 매진’이라는 기록은 작품의 힘이라기보다 스타 팬덤의 구매력이 만들어낸 현상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구나 최근 발표한 라인업 추가 이후 상황은, 이러한 시장의 민낯을 더 극명하게 확인시킨다. 지난 시즌 엘(L) 역으로 출연하며 큰 화제를 모았던 김성철과 아이돌 그룹 멤버로 거대한 팬덤을 지닌 규현 등으로 라인업이 교체된 직후의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두 배우의 합류 소식과 동시에 티켓 판매율은 상승했고, 작품은 다시 ‘피켓팅’의 대상으로 복귀했다. 빈 좌석이 눈에 띄었던 초반의 상황은 “스타 없이는 작품도 없다”는 시장의 냉혹한 공식을 재확인시켰다.

ⓒ오디컴퍼니

작품성보다 캐스팅이 우위를 점하는 기형적 구조의 배경에는 ‘티켓값 인플레이션’이 자리 잡고 있다. VIP석 티켓 가격이 20만 원에 육박하는 고물가 시대에 뮤지컬 관람은 고관여 사치재로 전락했다.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실패 확률’을 줄이는 방향으로 소비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작품의 내러티브나 새로운 배우의 해석을 기대하기보다는, 이미 명성이 높은 스타 배우를 선택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을 담보 받으려는 ‘안전 지향적 소비’가 고착화된 것이다. 제작사 역시 수익 보전을 위해 작품 개발보다는 스타 캐스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고, 치솟은 배우 개런티는 다시 티켓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 뮤지컬 업계 관계자는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한국 뮤지컬의 다양성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면서 “‘작품성’이 ‘배우’를 이기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는 제2의 홍광호, 제2의 김준수가 탄생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작품 그 자체의 브랜드가 흥행을 견인하는 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스타 캐스팅은 흥행의 기폭제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작품의 유일한 생명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때문에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얼굴의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데스노트’의 결정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