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에 새긴 마음, 열의 숨결이 만든 예술

이완우 2025. 12. 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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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삼화실 국가 무형유산 낙죽장 공방... "낙죽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완우 기자]

대나무 위를 스치는 불의 선(線)은 한 시대의 장인을 남기고, 그 장인의 손끝은 다시 한 공동체의 정원을 일구었다. 경남 하동 적량면의 작은 공방 삼화실에서 낙죽장 김기찬 명인은 오늘도 인두를 달군다.

조선 후기 박창규로부터 이어진 낙화 낙죽의 숨결, 수행처럼 깎아내린 장인의 정신, 그리고 이웃들이 나무를 기증해 함께 만들어가는 명품 정원의 풍경까지, 전통은 지금 하동 삼화실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불과 대나무, 사람과 마음이 이어낸 이야기. 이것이 '낙죽의 시간'이 흐르는 하동의 오늘이다.

불로 그린 선, 한 장인의 생애를 비추다
 하동 삼화실 명품 정원을 가꾸는 김기찬 명인
ⓒ 형정숙
지난 2일, 하동 적량면 삼화실 국가 무형유산 제31호 낙죽장 명인의 공방. 문을 여는 순간 대나무 향과 인두 냄새가 은은히 스며왔다. 진열대 위에 놓인 낙죽 작품. 누군가의 생애가 불로 지져진 것처럼 반듯하면서도 미세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김기찬 명인은 청년기에 순천 송광사 사하촌에서 살며 서예, 회화, 한문 공부를 익혔다. 낙죽은 담양에서 초대 낙죽장 이동연 선생에게 전수했다. 2대 국양문 선생의 조교로 활동했고, 2000년 7월 국가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의 3대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텅 빈 충만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하루 새벽, 공예관과 박물관에 두었던 제 모든 자료와 작품이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을 바꾼 사건은 2007년 겨울에 찾아왔다. 29년 동안 송광사에서 준비해 온 전통 낙죽 박물관의 꿈, 수집해 온 희귀 자료들, 선배 장인들에게서 물려받은 기법과 기록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관련 기사 : 임실에서 하동까지, 열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불이 제 욕심을 태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 제 작품은 제 것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죠."
"큰 접시는 작은 접시들을 다 받아낼 수 있잖아요. 사람도 그래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큰 접시론'이 탄생했다. 그는 시집 <화두라는 감옥에서 나를 꺼내다>, <반야배에 돛을 올리고>를 냈고, 23권의 낙죽 작품집, 한 편의 논문 <전통적인 낙화·낙죽에 관한 소고>(1993)를 남겼다. 학교 공부에 대한 못 다 이룬 갈증은 결국 책을 가장 많이 낸 낙죽장 기능보유자가 되는 데로 이어졌다.

낙죽이란 무엇인가
 국가무형유산 김기찬 명인의 낙죽 작품
ⓒ 형정숙
낙죽장에게 화로에서 달궈진 'ㄱ자' 인두는 손끝의 숨결을 대신해 주는 존재이다.

"낙죽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열의 숨결로 선을 그어가야 하니까요."

낙죽은 대나무를 고르고 다듬어 기물 형태를 만드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필통, 붓대, 차 판 등으로 가공하여 새길 문양과 글씨의 구상을 하고 밑그림을 그린다. 낙죽장의 핵심 도구는 'ㄱ자' 모양의 인두로, 화로에서 두 개를 번갈아 달구어 일정한 열기를 유지한다.
 국가무형유산 김기찬 명인의 낙죽 작품 활동 도구
ⓒ 형정숙
낙죽의 본 작업인 '지지기'는 뜨거운 인두로 대나무 표면을 지져 선을 긋고 문양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인두 온도와 손의 속도에 따라 선의 굵기와 농담, 질감이 달라지므로 숙련과 감각이 필요하다. 이어 농담 조절과 음영 표현을 통해 그림에 깊이와 입체감을 더하는데, 이 단계가 낙죽을 공예를 넘어 예술로 끌어올리는 핵심이다.

조선 시대 낙죽은 단순한 죽공예를 넘어 선비 문화와 생활 미학이 스며든 전통 공예로 자리 잡았다. 일상 기물 속에 예술성을 담아내며 유학적 미감과 서민적 감성이 공존했다. 김기찬 명인은 이러한 낙죽을 다시 예술의 단계, 더 나아가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장인으로, 그의 공방과 교육 활동은 낙죽의 현재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에서 하동까지, 불로 그린 그림의 계보
 국가무형유산 김기찬 명인의 낙죽 작품 과정
ⓒ 형정숙
조선 후기 낙화(烙畵)의 창시자로 불리는 박창규(朴昌珪, 1796~1861) 낙화장이 있다. 그의 자는 성민, 호는 낭간(琅玕) 혹은 화화도인(火畵道人)이다. 그의 호는 '옥처럼 맑고 빛나는 대나무(난간)'와 '불로 그림을 그리는 도인'의 의미를 지녀서, 낙화를 예술과 수행의 경지로 승화한 경지를 상징한다.

이규경(李圭景, 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낙화변증설(烙畵辨證設)이 있는데, '조선 순조 말기에 남원의 박창규가 낙화를 잘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1917년에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하였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846년에 출간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앞선 문헌 기록을 참조하여 낙화에 대해 간략히 서술해 놓았다.

<밀양박씨 호계공파보>에 따르면, 박창규는 1822년 동지상사 김노경(추사 김정희의 부친)을 수행해 연경(북경)에 이르렀다. 그는 그 사행길에서 낙화의 이치를 처음 깨우쳤다고 한다. 이는 그의 낙화 기술이 중국적 영향 위에서 조선적 기법으로 독자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박창규의 사촌 동생 박복규에 얽힌 일화는 거의 전설에 가깝다. 그가 만든 낙죽 담뱃대가 조선 24대 왕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에게 진상되었다고 한다. 담뱃대에는 용의 비늘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헌종이 연기를 들이켜면 비늘이 오므라지고, 내쉬면 다시 퍼지는 듯 보였다고 전한다. 불과 대나무가 만나 빚어낸 낙화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정교함을 떠올리게 한다.

박창규는 한지 위에 낙화의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얇은 한지에 그리는 낙화 기술은 중국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창규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최상의 경지라고 여겨진다. 나무나 대를 인두로 지지는 기술을 비교적 쉽지만, 얇은 한지가 불기운에 상하지 않게 그림을 그린 것은 '특별한 묘득(妙得)'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기술로, 조선에서 다른 나라에 내세울 만한 솜씨였다.

추사 김정희는 그에게 '화화도인'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고, 추사의 제자인 역관 김석준(1831~1915)은 박창규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拭拂忘筆墨(식불망필묵) 깨끗이 쓸고 닦으며 붓과 먹을 잊었고,
煉金繪形眞(연금회형진) 쇠를 달구어 참된 형상을 그려 낸다.
纖密工何極(섬밀공하극) 섬세하고 그윽한 솜씨 어찌 이리 지극할까?
款識益尖新(관식익첨신) 낙관까지 묘하고 새로움을 더하는구나.
木佛能渡火(목불능도화) 나무 부처가 불을 건너왔으니,
始見悟道人(시견오도인) 비로소 깨달은 도인을 보겠구나.

낙죽이 단순 기술이 아니라 정신 수행의 높은 경지임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박창규로부터 후손과 제자들은 150년 동안 낙화와 낙죽의 전통을 이어왔다. 그 계보가 오늘, 하동 삼화실에서 김기찬 명인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보였다. 박창규가 대나무에 남긴 선 하나, 김기찬 명인이 불 위에서 완성하는 선 하나는 시대를 건너 서로를 비추는 듯했다.
 국가무형유산 김기찬 명인의 낙죽 작품
ⓒ 형정숙
사람과 나무, 돌이 함께 어울린 예술

김기찬 명인이 지난 몇 년 동안 몰두해 온 작업은 정원 가꾸기였다. 하동 적량면 구재봉 자연휴양림과 갈라지는 길목에 자리한 삼화실 공방 앞마당. 참빗살나무, 모과나무, 엄나무와 매실나무 등 뿌리 깊은 나무들이 누군가의 선뜻 내어 놓은 나눔 속에서 이곳 정원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김기찬 명인은 기증받은 나무의 이름을 붓글씨로 쓰고 돌에 새겨 정원 곳곳에 세웠다.

"자기 것이라고 울타리 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공예도, 정원도, 나무도 결국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합니다."

삼화실 정원은 누가 주체가 되어 조성한 완성된 정원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서 함께 만들어가는 미완성의 현재 진행형 정원이다. 한 주민이 평생 모아온 수석 다섯 상자를 가져왔다. "정원에 쓰세요"라고 건넸다. 비록 명품은 아니었지만, 김기찬은 그 마음을 귀하게 받아들였다.
 하동 삼화실 명품 정원
ⓒ 이완우
정원 조성에는 이웃의 삶도 스며 있었다. 어느 날, 세 딸을 키우는 주부가 정원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김기찬 명인은 돌에 글을 새겼다. '자녀로 국익에 이바지한 어머니'라는 의미의 글이었다. "나는 나무 한 그루 심었을 뿐인데 나라에 이바지했다고요?"라며, 그 주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고 한다. 김기찬 명인은 누군가의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삼화실의 정원은 결국 누구나 참여하여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정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김기찬 명인의 낙죽 문양이 돌마다 새겨지며 하동의 새로운 문화 정원으로 날마다 자라나고 있었다. 하동 삼화실에서 확인한 낙죽의 전통은 단순한 공예 기술의 전승을 넘어, 지역 공동체와 함께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낙죽은 오늘도 하동의 삶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그 선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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