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뇌경제’가 바꾸는 산업 신풍속도…값싼 범용 제품 시대 뒤안길로

반진욱 매경이코노미 기자(halfnuk@mk.co.kr) 2025. 12. 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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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꽃피고 제조업 변신 중

한국 경제는 오랜 기간 분석·규칙 기반 사고를 뼈대로 한 ‘좌뇌형 모델’에 의존해왔다. 그 결과, 창의력보단 효율과 속도에 몰두했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의류 등 한국 주력 산업은 모두 효율과 공정에 집중하는 구조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가 불과 6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이러한 ‘좌뇌형 압축 성장’ 방식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2020년대 들어서는 기존 성공 공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중국, 인도 등 압도적인 자원을 앞세운 국가들이 한국식 압축 성장 모델 장점을 모두 앗아간 탓이다. 가성비, 효율만으로는 세계 시장서 한국산을 앞세우기 힘든 시대다. 위기에 처한 한국 산업의 ‘넥스트 스텝’으로, 창의력과 감성을 앞세우는 ‘우뇌경제’가 주목받는다. 이는 효율성·속도(좌뇌경제) 대신 창의력·직관·상상·감성·위험 감수(우뇌경제) 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경쟁 환경이 급변하면서 한국 주력 산업은 우뇌경제 요소를 접목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콘텐츠·엔터 등 ‘우뇌형 모델’ 기반 산업은 한국 경제 새 먹거리로 떠올랐다.

한국 반도체는 고객 맞춤형 설계를 중심으로 한 HBM 제품 생산을 늘리며 우뇌경제 확대에 대비하고 있다. 사진은 AI 서밋에 전시된 SK하이닉스 HBM3E. (연합뉴스)
‘좌뇌경제’ 제조업

창의력 더하며 환골탈태 중

효율성과 대량생산을 중시하는 제조 중심 산업은 일반적으로 ‘좌뇌형 모델’로 꼽힌다. 값싸게 물건을 만들어 대량으로 팔아야 이익이 남아서다. 때문에, 이들 산업은 KPI(핵심성과), ROI(투자대비수익), 비용 감축 등을 주요 지표로 설정, 기업을 운영했다.

최근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값싸고 표준화된 범용 제품 시대는 뒤안길로 접어들었다. 창의력을 중심으로 한 우뇌경제형 모델로 승부를 띄워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반도체 산업은 우뇌경제 중에서도 ‘창의력’이 중요해졌다. 산업 헤게모니가 대량생산에서, 맞춤생산(커스텀 비즈니스)으로 옮겨가서다. 오랜 기간 한국 반도체는 두뇌 역할을 하는 메모리 범용 칩 중심으로 성장했다. 범용 칩은 똑같은 칩을 대량 생산하는 구조다. 핵심 경쟁력은 얼마나 낮은 단가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차량, 가전, 카메라 등 곳곳에 전자제품이 들어가면서 비메모리 분야서 쓸 수 있는 다양한 반도체 수요가 폭증했다. 범용 메모리와 달리 비메모리 반도체는 탑재되는 기기에 따라 형태가 제각각이다. 고객 맞춤형 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20년부터는 AI 혁명이 시작됐다. 팹리스(설계 중심) 회사가 원하는 사양의 메모리 칩을 만드는 게 핵심 역량으로 떠올랐다. 반도체 밑그림을 설계하고 이를 고객 요구에 맞춰 양산 가능하도록 공정 프로세스를 재규정하는 등 설계 역량이 핵심이 됐다.

변화 초반 한국 기업들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표준화된 공정 기술로 대량생산하는 것에 집중해온 탓이다. 고객이 원하는 대로 제품을 만들어 가져다주는 ‘창발력(창의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진 환경을 간파하지 못했다. 좌뇌형 설계 역량이 핵심인 파운드리 분야에서 고전을 거듭했고 시스템 반도체 강자인 TSMC에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후 AI 반도체 분야에서 ‘우뇌경제’ 요소를 조금씩 접목하며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고객 중심 설계를 앞세운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했다.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도 차세대 모델인 HBM4부터는 흐름에 올라탔다. 삼성전자는 더 나아가 파운드리 시장서도 조금씩 존재감을 넓히는 중이다. 이들 기업은 단절된 구조로 운영됐던 기존 반도체 설계·제조·공정에서 상호 연결성을 높이는 쪽으로 통합적인 프로세스를 구축 중이다

자동차 분야는 우뇌경제의 ‘감성’과 ‘공감’ 개념에 집중한다. 자동차가 단순한 ‘탈것’에서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공간이자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탓이다. 이른바 SDV(Software 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의 등장이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앤드마켓에 따르면, SDV 시장 규모는 2024년 2135억달러에서 2030년 1조2376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SDV 핵심은 ‘홈 투 카(home to car)’다. 운전자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차량에 탑승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특별한 준비 없이도 집안, 자동차 환경이 자동으로 사용자에 맞춰주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출근길 현관 도어락을 열면 집안 조명이 꺼지고 로봇청소기가 작동하는 동시에 차량 시동과 공조가 자동으로 켜진다. 추후, 완전 자율주행까지 활성화되면, 운전자가 할 일이 아예 사라진다.

이미 마력, 주행 성능 등으로 경쟁하는 방식은 한계에 도달했다. 모빌리티 시대에는 어떤 감성과 경험을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SDV 전환에 가장 적극적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SDV 전환에 사활을 걸었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업력이 60여년인데, 이 가운데 과거 3분의 2는 가성비가 좋은 모델 개발에 주력해왔다면, 이후 3분의 1 시기는 고품질과 더불어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 등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AI,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전동화, 로보틱스, 수소 등 미래 신사업 분야에 50조5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성능 중심서 경험과 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또 다른 분야가 가전이다. 가전은 과거 ‘백색가전’으로 불렸다. TV를 제외한 냉장고, 세탁기 등 주요 가전이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소비자는 가전 디자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성능만 봤다. 오래 쓸 수 있고 성능 좋은 가전이 최고였다. 옛 대우전자가 튼튼하지만 투박한 상품을 만드는 ‘탱크주의’로 시장을 휩쓴 배경이다.

이제는 다르다. 가전도 실내 인테리어의 하나가 됐다. 성능이 좋아도 디자인이 주목받지 못하거나, 집안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으면 배척받는다. 삼성전자 ‘비스포크’, LG전자 ‘오브제’ 시리즈 등 디자인을 앞세운 제품이 주목받는 이유다. 소비자 감성에 공감 못하는 상품은 살아남기 힘들다. 올 들어서는 아예 가전과 인테리어를 통합한 상품도 내놨다. LG전자가 내놓은 ‘홈스타일’이 대표적인 예다. 공간에 어울리는 가전, 가구, 조명 등을 추천하는 서비스다. LG전자 관계자는 “온라인브랜드샵을 이용하는 고객 다수가 가전 구매 과정에서 가구나 조명 등 리빙 제품에도 높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을 파악해 서비스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 새로운 중추로 떠오른 조선과 방위 산업은 한국 특유의 좌뇌경제와 우뇌경제 강점이 제대로 결합한 사례다. 두 산업은 고객마다 주문하는 제품이 다른, ‘커스텀 비즈니스’인 동시에, 빠른 납기, 제품 신뢰도가 중요한 ‘신용 사업’이다. 즉, 고객 요구에 따라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면서도 효율성과 성능까지 잡아야 한다. 이 2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국가는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조선업의 경우 일본, 유럽, 미국 등 업체는 설계 능력이 뛰어나지만 건조 능력이 취약하다는 평가다. 납기를 정확히 지키지 못하고 건조 비용도 비싸다. 반면, 중국 업체는 빠른 건조가 가능하고 비용이 싸지만, 고객이 원하는 수준의 제품 설계가 여전히 쉽지 않다. 반면, 한국 업체는 창발력 있는 설계(우뇌), 효율적인 생산(좌뇌) 역량을 모두 갖췄다. 단순한 컨테이너선 외 LNG추진선, 군함, 잠수함, 쇄빙선 등 특수선에서 경쟁력이 월등하다고 평가받는 배경이다.

방위 산업도 마찬가지다. 서방 군수 업체는 뛰어난 성능의 무기를 만들지만, 생산 속도가 느리다. 반대로 중국, 러시아 제품은 적용되는 기술 체계가 아예 달라 호환이 안 된다. 서방제 무기를 쓰는 나라 입장에서는 한국 방위 산업 외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한국 조선업은 빠른 납기(좌뇌), 창발력 있는 설계(우뇌)로 특수선 시장서 강점을 발휘한다. 사진은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이지스구축함 ‘다산정약용함’을 진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우뇌경제가 열어주는 신산업

콘텐츠·IP, 한국 경제 동력으로

기존 산업은 좌뇌경제 중심 체제에, 우뇌경제 경쟁력을 조금씩 접목하는 형태로 진화 중이다. 최근 새 먹거리로 떠오른 콘텐츠, 엔터, 뷰티 등은 반대다. 우뇌경제의 핵심 가치를 원동력 삼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만이 보유한 아티스트(상품) → 팬덤 → IP → 커머스 → 금융으로 이어지는 통합적인 가치사슬은 ‘한국형 우뇌경제’ 핵심 경쟁력으로 평가된다.

국내 엔터, 콘텐츠, 뷰티 업체는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 유행에 민감한 국내 소비자를 상대하며 축적된 경험이 많아서다. 일례로, 하이브는 음악과 아티스트 서사를 중심으로 팬덤과 감정적 연대를 구축한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이를 IP·커머스·공연으로 확장하며 통합적인 가치사슬을 완성했다. 위버스를 통해 축적한 팬 행동 데이터를 활용해 콘텐츠와 상품을 재설계하는 점도 우뇌경제 특유의 감성·경험 중심 모델로 평가된다. 팬덤 소비자 구축은 브랜드 로열티 강화로 이어져 중장기적으로 경제적 가치를 보유한 ‘IP(지식재산권)’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한국 엔터, 콘텐츠는 아티스트, 팬덤, IP로 이어지는 우뇌경제 신산업 밸류체인의 핵심으로 꼽힌다. 사진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그룹 BTS. (하이브 제공)
아티스트와 콘텐츠, 뷰티 등 상품이 IP로 거듭나면 상품과 브랜드 파급력이 더욱 커진다. 직접적인 매출 상승은 물론, 간접적으로 다른 산업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티스트 팬덤은 노래만 듣지 않는다. 아티스트 모습이 그려진 상품이나 공연 응원봉 등 ‘굿즈’를 사들인다. 또, 아티스트가 광고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들이거나 이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세계관은 게임·굿즈·테마파크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IP가 확립된 한국 엔터, 콘텐츠 산업은 한국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파생 상품과 제조업 연계 효과까지 고려하면 한국 콘텐츠의 실질적 수출액은 이미 2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탄탄한 커머스, 금융 서비스가 뒤를 받친다. 빠른 인터넷 속도와 디지털 인프라를 토대로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플랫폼서 손쉽게 공연을 예매하거나 굿즈를 살 수 있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덕분에 넷플릭스와 유튜브 같은 OTT 시청도 편리하다. 이들과 연계한 결제 서비스인 토스페이,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을 이용하면 복잡한 인증 절차 없이 바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빠른 배송망 덕분에 전날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물건을 받아볼 수도 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류 IP의 글로벌 경쟁력과 결합한 디지털 결제·핀테크 인프라는 한국형 우뇌경제의 최고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7호 (2025.12.03~12.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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