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공격 예고한 트럼프... '마약'은 명분, 진짜 이유 따로 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12. 4. 14: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반미 정권' 압박하는 트럼프의 야욕

[김종성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월 27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군인들과 통화한 뒤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직접적 군사 개입을 회피한다. 그러면서도 중남미 지역의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직접적 개입을 불사할 모양새다.

올 한 해 동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달리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지만, 베네수엘라는 특히 많이 시달렸다. 3월 16일에는 베네수엘라 출신 미국 이민자 238명이 몸에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베네수엘라 마약·폭력 조직 '트렌 데 아라과(TdA)'의 조직원으로 지목돼 엘살바도르로 추방됐다.

이어 3월 24일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석유와 가스를 구매하는 국가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라는 위협적인 문구가 트럼프의 트루스소셜 계정에 등장했다. 그달 31일 발표되는 상호관세 부과로 인해 전 세계가 '관세'라는 단어에 특히 민감할 때였다.

5월 26일에는 미국이 싫어하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통합사회주의당(PSUV)이 총선에서 82.68%로 승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3개월 뒤인 8월 18일, 미국이 마약 카르텔에 대응하고자 이지스함 3척을 36시간 이내에 베네수엘라 해역에 파견한다는 보도가 <로이터>에서 나왔다.

9월 5일에는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직접 타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CNN에서 나왔고, 미군이 베네수엘라 인근 공해상에서 마약 밀매선을 격침했다는 보고가 피터 헤그세스 미국 전쟁부 장관의 엑스 계정에 나타났다. 10월 10일에는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됐다. 12월 2일에는 트럼프가 백악관 내각회의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상 공격을 예고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마약이 자국에 해롭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이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베네수엘라의 반미·진보 정권을 몰아내고 이 나라의 석유에 손을 담그며, 중남미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 목적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처음에는 중남미를 신사적으로 대했다. 스페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상처를 보듬으면서 이 지역에 접근했다. 그 모습은 제국주의 일본이 동아시아 각국에 접근할 때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일본은 함포외교 같은 군사적 카드를 앞세워 동아시아 국가들을 위협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국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일본은 강화도사건을 수습하는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국은 자주국"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자국이 조선에 접근하는 목적이 조선과 청나라의 종속관계를 깨트리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원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뒤에 러시아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동양평화론을 부각시켰다. 자국이 조선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러시아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것은 동양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선전했다.

안중근은 자신이 한때 일본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일본이 러시아의 동양 침략을 막아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동양평화론>에 썼다. 그는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이 선포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라며 "이와 같은 대의가 청천백일의 빛보다 더 밝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도발해 중국 독점 야욕을 노출하기 전까지, 영국·미국 등은 일본의 전쟁 도발과 오키나와·대만·한국 강점을 지지했다. '동아시아의 자주독립을 지원한다',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선전전의 결과로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여론이 유럽과 미국에 조성된 것도 이런 상황을 만든 한 가지 배경이다.

중남미를 수탈한 미국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지난 1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지역사회 기반 단체들의 취임 선서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마두로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열린 행사다.
ⓒ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이 청나라의 지배 및 간섭과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동아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면, 미국은 스페인의 지배와 영국 등의 위협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라틴아메리카연구> 2005년 제18권 제4호에 실린 김창민 서울대 교수의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역사적 관계와 문학적 이미지'는 "1820년경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있을 무렵, 미국은 유럽열강들과 맞설 정도로 국력이 신장되어 있었다"면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적극 지원"했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세계정책과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1823년의 먼로 독트린은 흔히 고립주의 외교정책으로 설명되지만, 이 선언은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측면도 컸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외부세력의 간섭이나 식민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 독트린의 속뜻을 위 논문은 이렇게 풀이한다.

"어떻게 보면 이 선언은 미국이 자신의 이웃국가를 열강의 착취로부터 지켜주고자 하는 충정의 발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전개된 실상은 그와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쉽게 말해서, 이제 아메리카 전(全) 대륙은 미국이 혼자 알아서 할 테니 유럽제국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시작됨을 만천하에 알리는 서곡이었고, 유럽제국에 대한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일본이 대(對)중국 자주독립론이나 동양평화론을 활용한 것처럼,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활용해 본심을 감췄다. 미국이 얼마나 표리부동했는지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가슴 뭉클하게 만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중남미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위 논문은 "윌슨 대통령은 전임자들과는 달리 이상적인 외교정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재임 시절 니카라과·멕시코·쿠바·도미니카공화국 등에 무력 침략을 자행함으로써 미국 외교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라고 설명한다.

먼로 독트린의 본질을 철저히 경계할 여력과 상황이 되지 않아 미국의 힘을 확 끌어들인 나라가 19세기 후반의 베네수엘라다. 미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나라에 대한 개입을 통해 세계 최강 영국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면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서양사론> 2016년 제129호에 실린 역사학자 최정수의 논문 '미서전쟁과 미제국의 이념 만들기'는 "미국으로 하여금 제국의 거대전략을 마련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고민케 한 사건은 제1차 베네수엘라 위기(1895~1896)였다"라며 "영국과 베네수엘라 간의 영토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베네수엘라가 먼로독트린을 근거로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고 클리브랜드 정부가 응함으로써 미국과 영국 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라고 말한다.

미국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를 보호하는 구출자의 이미지를 앞세워 중남미에 접근했다. 그런 뒤 군사 개입과 경제적 팽창을 통해 이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전락시키고자 했다.

위의 김창민 논문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값싼 노동력 때문이었다"라고 한 뒤 "스탠다드오일사와 걸프사의 주요 유정이 있는 베네수엘라에는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가" 들어섰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것은 거기에 마약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친미 정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 정부의 모습은 20세기 전반까지 세계를 휩쓸었던 제국주의의 세계 수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이 트럼프 버전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