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보수 정치, 희망은 아직 있는가

2025. 12. 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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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선거일이 되면 방송사들은 대대적인 개표방송을 준비한다. 가령 이 칼럼이 실리는 2025년 12월 4일이 대통령 선거일이라면 “12·4 국민의 선택은?”이라든가 “선택! 2025!” 같은 제목이 흔히 달리곤 한다. 그런데 선거는 정말 국민의 선택일까? ‘선택(choice)’과 ‘판단(judgment)’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선거를 선택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선거는 판단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심판의 날(Judgment Day)’은 선택의 날이 아니라 판단의 날이다. 선택은 골라내지만, 심판은 휩쓸어버린다.

「 계엄 이후 진보-보수 균형 깨지며
40년 된 ‘86 프레임’ 더욱 강력해져
“보수에 언젠가 기회” 기대는 환상
새 프레임 못 만들면 반전은 요원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운데)가 3일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 앞에서 구속 영장이 기각된 추경호 의원을 마중한 뒤 취재진에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국민의힘은 중도층이나 수도권은 물론이고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영남에서조차 위태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와중에 당내에서 가장 심각한 현안은 오늘의 망조가 누구 탓인지 따지는 것이다. 당의 중진들조차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바에는 여당과의 경쟁에서 이겨봐야 별 의미 없다고 본다는 뜻도 된다. 그러면서도 내년 지방선거에는 은근히 기대를 건다. 문재인 정부 때의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때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1년이 지나도록 자유한국당은 궤멸적 상황이었지만 소득주도성장 논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조국 사태 등 문재인 정부의 잇따른 실정으로 어찌어찌 살아나서 돌고 돌아 집권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차피 두 거대정당이 번갈아 권력을 차지하는 건데, 당권 잡고 버티고 있으면 기회는 언제 와도 온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보수정당에 그런 기회가 또 올까. 이대로라면 몇 년이 걸리든 보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권자의 판단 근거가 되는 보수의 프레임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선택’에 앞서 ‘판단’을 한다는 것이 행동경제학이 밝혀낸 핵심 명제이다. 선택은 합리적일 수 있지만, 판단은 편향적이다. 일단 어떤 편향이 주어졌을 때 합리적인 사람들조차도 그 편향을 뒤집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 편향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프레임이다. 반드시 행동경제학이 아니더라도 푸코의 ‘에피스테메’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것을 한 사회를 주조하는 가장 근본적인 거푸집으로 이해했다.

진보-보수의 균형이 깨진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프레임은 40년 된 86세대의 그것이다. 낡고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경쟁 프레임이 없는 한 지속된다. 그들의 프레임에서 보수정치는 군부독재의 후예이자 멀게는 친일파의 후손이다. 대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에 알랑대는 매판자본이다. 지식인은 외국(주로 미국) 학문의 수입상이자 지조 없이 흔들리는 기회주의자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 연대하여 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동지이다. 세월이 흘러 이 프레임도 예전보다는 다듬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편향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고 있다. 과거에는 안보와 산업화라는 보수의 경쟁 프레임이 있었지만, 이제 50년대의 전쟁과 70년대의 성장을 경험한 세대는 물리적인 퇴장을 마쳐가는 중이고, 투표소에 나오는 최고령층이 가장 진보적 세대인 세상이 되었다.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져다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혼자의 노력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프레임을 만든다는 것은 개미가 주식투자 해서 강남에 아파트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결국은 이미 나와 있는 어떤 프레임을 접하게 되고,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그 프레임을 받아들여 자신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후지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프레임의 힘은 강력하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거나 혹은 그 프레임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선택에 놓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초선·재선 의원들이 3일 국회 소통관에서 '비상계엄 1년, 성찰과 반성'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여야가 모두 강성 지지층만 보고 달리는 정치적 양극화의 세상이지만, 중도층도 기본적으로는 민주당을 선택한다. 치명적인 신종 감염병에 대응해서 A라는 약을 쓰면 600명 중 200명이 확실히 살고, B라는 약을 쓰면 600명이 살 확률이 1/3이고 다 죽을 확률이 2/3라고 한다면, 대부분 사람은 A를 쓰기를 원한다. 사실 두 약이 생명을 구할 확률은 완벽하게 똑같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약이나 택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200명만이라도 확실히 살린다는 A가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마찬가지로 경쟁 프레임이 없는 상황의 중도층은 국민의힘을 선택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을 선택한다. 중도 국민은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힘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1년 전 계엄이 가져온 최악의 결과 중 하나는 보수의 서사를 절멸시켰다는 점이다. 이 나라를 이해하는 보수의 새로운 프레임을 공유해내지 못한다면 당분간 그들은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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