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 말고는 없어요?"…13년째 그대로인 편의점 상비약 '빗장' 풀릴까
의약품 규제 푼 미국·일본, 한국은 '보수적'
대한약사회 안정성 및 오남용 우려는 '여전'

늦은 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편의점을 찾았다가 빈손으로 나오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다. 해열제나 소화제 정도는 구할 수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일반 의약품 대다수는 편의점 판매 허용 품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 시간과 공휴일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도입된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상비약) 제도가 시행 13년째를 맞았지만, 판매 품목은 단 한 차례도 늘어나지 않아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실 주최로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편의점 안전상비약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제도 도입 이후 13년 동안 13개로 묶여있던 상비약 품목을 확대하고,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소비자 90% 편의점 약 도움…“실제론 11개뿐”
편의점 안전상비약 제도는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취지로 2012년 약사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이후 24시간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 판매가 시작됐으나 현재 판매가 허용된 품목은 해열진통제·감기약·소화제 등 총 13개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타이레놀정 80mg’과 ‘타이레놀정 160mg’은 판매가 중단돼 실제로 판매되는 제품은 11개 뿐이다. 법적으로는 최대 20개 품목까지 지정할 수 있지만 지난 13년 동안 추가된 품목은 단 한 개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발제를 맡은 안혜리 소비자공익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최근 소비자 108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 이상이 편의점 상비약이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고 답했다”며 “소비자들은 현재의 품목 제한에 대해 불편을 넘어 건강권 침해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소비자들이 가장 시급하게 추가를 원하는 품목은 ▲소아용 전용약(해열제 등) ▲증상별 진통제 ▲제산제 ▲화상 연고 ▲지사제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경우 한밤중 아이가 열이 나거나 배탈이 났을 때 선택지가 없어 발을 구르는 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확인됐다.
토론자로 나선 이선영 행복교육미래 감사는 “여행지나 명절 연휴에 아이가 아파 약국을 찾아헤매다 결국 편의점에 갔지만 약이 없어 낭패를 본 경험은 부모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라며 “국민의 생명권과 선택권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규제 푼 선진국, 약국 밖 시장 ‘활짝’
국내 상황이 13년째 제자리인 것과 달리 해외 주요 선진국들은 과감한 규제 완화를 통해 소비자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가까운 일본은 2009년 약사법 개정을 통해 빗장을 풀었다. 약을 1~3류로 세분화해 부작용 위험이 적은 해열진통제(2류)나 비타민·소화제(3류)는 약사가 아니더라도 ‘등록판매사’ 자격만 있으면 편의점이나 드럭스토어에서 판매할 수 있게 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약사가 조제를 하는 기존 약국 외에 일반 의약품을 슈퍼마켓의 상품처럼 파는 ‘체인형 약국’이 급성장했다.
미국 역시 ‘셀프 메디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국가 중 하나다. 미국은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진통제와 감기약, 소화제는 물론 알레르기약 같은 다양한 일반 의약품을 시간·수량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다. 심지어 편의점 자체 브랜드(PB) 의약품까지 판매될 정도로 시장 이 활성화 돼 판매하는 품목만 30만종에 달한다. 국내에서만 ‘안전성’을 이유로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외국의 경우 안전상비약 제도가 이미 사회적으로 보편화 돼 있다”며 “가벼운 경증 질환에 대해서는 (약국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 세계적인 레퍼런스(표준)이자 공통된 사항” 이라고 설명했다.
약사회 “오남용 우려” VS 전문가 “조속한 심의 필요해”

소비자 요구에도 불구하고 약사 단체는 안전성 및 약물 오남용 문제를 지적하며 품목 확대를 반대하고 있다. “품목 확대보다 복약 상담이 가능한 약국 체계가 우선 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춘배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안전상비약 제도는 약국 폐점 시간의 접근성을 위한 예외적인 조치일 뿐”이라며 “편의점 판매 업소의 95% 이상이 가격을 표시를 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규정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의 직무 유기’를 꼬집었다. 3년마다 심의를 진행하도록 한 조항이 있지만, 2018년 이후 심의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법적으로 3년마다 타당성을 재검토하게 돼 있는 심의위원회가 약사회의 반대와 복지부의 무관심 속에 수 년 째 열리지 않고 있다”며 “전국 읍면동이 3400여곳인데 공공심야약국은 220여곳에 불과해 조속히 위원회를 열어 품목 조정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변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강준혁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울진 등 지방의 경우 읍면동 전체에 약국이 하나도 없는 무약촌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이런 의료 취약지의 접근성 강화를 위해서라도 안전상비약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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