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환율 급등 사태의 본질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만 놓고 보면 지금 한국 경제는 위기다. 지금까지 원-달러 환율이 1450원대 위로 치솟은 경우는 세 번 있었다. 1997~98년 외환위기,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12·3 비상계엄 사태. 그리고 지금이다. 26일 종가는 1465.6원. 그런데 이번엔 성격이 다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위기가 와서 환율이 올라갔다. 지금은 환율이 너무 올라가는 것 자체가 한국 경제를 위기로 밀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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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율 급등만 보면 지금은 위기
개인·기업 등 자본 ‘탈한국’ 조짐
한국 경제에 대한 확신부터 줘야
」

우리 사회엔 ‘고환율주의’가 막강하다. 고환율이 수출에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는 특히 경제가 나쁠수록 힘을 받는다. 수출이라도 살아야 경제 붕괴를 막을 수 있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일반 국민의 희생이 있다. 한국은 식량과 석유, 그리고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한다. 환율이 급등하면 물가가 비싸진다. 빵값도, 집값도, 공공요금도 다 올라갈 수밖에 없다. 소득이 늘지 않는 이들은 저절로 가난해진다. 내수는 침체에 빠지고 경제는 활기를 잃는다. 이게 위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환율 급등은 결국 달러 수요가 크게 늘어서다. 대략 네 가지 요인이 꼽힌다. ① 미국과의 금리 차이. 미국 기준금리는 연 3.75~4%로 한국(2.5%)보다 1.5%포인트나 높다. ②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 지난 9월 광의의 통화지표인 M2는 4430조원으로 사상 최대다. 1년 전보다 8.5% 늘었다. 돈이 많아지면 가치가 떨어진다. ③ 해외 주식 투자 급증. 올해 들어 25일까지 서학 개미의 순매수액은 297억 달러로 지난해(105억 달러)의 2.8배다. ④ 미국과의 관세 협상 결과 10년간 매년 최대 200억 달러를 투자하게 돼 시중 달러가 부족해질 거란 우려.
타당한 분석이지만, 이것만으론 최근 환율 급등세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①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크지만 2023년 이후 약 2년간 2%포인트 차가 나기도 했다. ② 통화량은 갑자기 증가한 게 아니라 계속 늘어 왔다. ③ ‘국장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됐는데 왜 올해 폭증했을까. ④ 정부는 외환보유액 운용 수익 등으로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연간 200억 달러 조달이 가능하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흔히 ‘인플레와의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플레 기대심리를 잡는 거라고 한다. 물가가 오를 거라고 예상하면 모두가 물건 값을 올리기 때문에 인플레가 더 심해진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지금 시중엔 앞으로 달러 수요가 더 늘고 원화가치는 더 흔들릴 거란 예상이 넓게 퍼져 있다. 거기엔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과 불안감이 크게 작용한다. 우선 기업하기에 점점 나쁜 환경이 돼 간다. 가뜩이나 중국 기업에 밀리고 있는데, 현 정권 들어 노란봉투법 등 기업 압박 규제가 쏟아지고 있다.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경제 성장은 물 건너간다. ‘헬(Hell) 코리아’ 인식도 가세한다. 부동산 폭등과 일자리 부족에 좌절하는 청년세대는 해외 투자에 눈을 돌린다. 게다가 정권의 돈 풀기 포퓰리즘은 원화 가치를 더 끌어내릴 전망이다. 진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다. 12·3 계엄 사태 1년이 되도록 정치는 ‘계엄’과 ‘내란’에 갇혀 있다. 그러니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고 비관하는 이들이 느는 거고, 그 결과가 자본의 ‘탈(脫)한국’과 원화값 추락(환율 상승)이다. 올해 한국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가 2400명, 이들이 해외로 갖고 나가는 자금이 152억 달러에 달할 거라는 해외 컨설팅업체 예측도 있다.

정부의 환율 대책은 번지 수를 잘못 짚었다. 달러화를 풀라고 수출 기업 팔을 비틀거나 국민의 노후 안전망인 국민연금의 달러 자산을 건드려서 될 일이 아니다.
외환위기 때는 외국인들이 떠나갔지만 지금은 우리 국민의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다. 환율 급등 사태의 본질은 대한민국 경제에 대한 확신과 낙관의 결핍이다. 환율 대책은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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