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타고 가서 본 우리 읍성, 일본과 뭐가 다르냐면
[이병철 기자]
국보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은 홍성에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길 옆 계곡에 있다. 삼국시대, 사비성을 출발한 백제인들은 그 길을 따라 홍성을 거쳐 서산으로,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빈번한 도해(渡海)라 할지라도 결국 거친 바다를 맨몸 하나로 맞서는 일이었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쩌지 못하는 영역을 초월자에 기대는 것은 당연했다.
태안의 마애삼존불, 예산의 사면석불이 그러했고, 이곳 용현리마애삼존불 역시 간절한 기원의 소산이다. 거친 바다를 건너기 전 사람들은 의식을 치르듯 계곡 위 거친 돌에 현현한 보살에게 두 손 모아 무탈함을 빌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심정으로 서산 용현리 계곡을 찾는다. 10월 26일 일요일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찾은 곳
작은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제법 긴 여행을 떠난 참이다. 서울과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에 접어 들었다. 일찍 찾아온 차가운 계절 탓에, 속살을 파고드는 바람이 몹시도 서슬했다. 몸속 피까지 식어갈 쯤 고풍저수지 지나 마애불이 있는 계곡으로 접어든다.
이젠 너무도 유명한 관광지일 터지만, 주변 풍광은 큰 변화가 없었다.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멈추고 장갑과 헬멧을 벗었다. 가볍게 떨리는 몸을 추스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에 섰다. 뭔가 이상했다. 다리 입구를 커다란 간판이 막고 있었다. 지난 여름의 폭우로 계곡길이 많이 상해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마애불이 상하진 않은 모양이다. 건너편 숲 언저리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마애불이 모셔진 바위리라.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직접 뵙지 못한들 어떠한가. 어차피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미련 둘 일은 아니다. 바위 보살님도 웃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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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 보원사지. 용현리 마애 산존불 지근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찰터. 지금은 당간지주와 쌍탑 등 몇 가지 석물이 남아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의 고향이다. |
| ⓒ 이병철 |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곧 홍성 시내 한복판을 지나갔다. 옆으로 가을빛에 환한 홍주읍성의 정문, 조양문이 보였다. 우리네 읍성은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다는 공동체 정신의 한 표상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전국의 대부분 읍성을 헐어버렸다. 홍주성도 그랬다. 특히 이곳은 항일 의병의 격렬한 항쟁까지 있었던 곳이다(1906년 항일의병의 홍주성 점령). 일제는 집요했을 것이고, 조양문만이라도 지키려 했던 홍성 사람들은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머물려 하면 오래 걸릴 듯하여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여유를 내어 찬찬히 돌아볼 곳 하나를 남기니 아쉬움보다는 설렘을 간직하고 떠난다. 어차피 지금 다른 읍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남쪽으로 계속 달려 광천을 지나고 보령을 지났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뭔가 돌담 사이를 지난 것 같은데. 마주 보이는 것은 학교(남포초등학교) 건물이다. 운동장을 크게 돌아 좁은 길을 계속 따라간다. 주차장이 있을 법도 한데 마땅한 곳이 없다. 곧 허물어질 듯한 돌담 사이를 다시 지났다. 이곳이 남포읍성임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은 진즉 멈췄다.
어디가 읍성이란 말인가? 좁은 농로 한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뿔싸. 지금 지나온 두 곳의 돌담 사이가 각각 동문지와 서문지였다. 복원된 성문도 없고, 변변한 주차장도 없으니 도착했어도 도착한 인식을 못했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학교 뒤편 북쪽 성벽에 관아 건물이 몇 보였다. 학교를 다시 돌아 얼마쯤 가니 고식의 2층 문루가 보였다. 그 앞에 오토바이를 세운다. 조선 세종 대에 석성으로 완성된 남포읍성이다.
정비된 듯 정비되지 않은 북동쪽 성벽에 당시 관청 건물이 바싹 붙어 있다. 정문 격인 2층의 진서루, 중문 격인 내삼문(옥산아문)과 외동헌까지 총 세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유교적 중앙 집권 질서하에 각 지방의 관청들은 거의 같은 모습을 띠었고, 문루의 이름마저도 진서루니 진남루니 엇비슷했다. 질서를 위한 것이겠으나, 이미 그 시절에도 이 땅의 사람들은 극단의 효율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혼자 빙그레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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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포읍성 진서루. 남포읍성 관아의 정문격인 2층의 누각건물이다. 현판에는 서쪽을 진압한다는 뜻의 진서루라 하고 있다. 멀리 잔디로 덮인 성벽 일부가 보인다. |
| ⓒ 이병철 |
그러나 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성은 오로지, 영주를 위한 시설이었다. 백성은 물론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어도 자신만 살아남으면 되었고, 또 평상시에는 백성들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그들의 성이었다.
하지만 우리네 성은 모두 같이 살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전쟁이 나면 민, 관, 군이 모두 성 안으로 들어 총력으로 대항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작은 땅조차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난, 아무리 보잘것없는 곳이라도 읍성이나 그 흔적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일제에 의해 훼철된 우리네 읍성들이 가능한 많이 복원됐으면 좋겠다.
일제강점기를 상시시키는 군산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 군산으로 가는 길에 기대했던 하굿둑길은 지나지 않았다. 웬만하면 내비게이션을 따라가기로 했기에 미련은 두지 않는다. 너른 금강을 가로지르는 동백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몇 블록인가 옛 군산 시가지와 겹친다. 개항 후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곳답게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흔적 몇 곳이 명징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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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군산세관. 구한말 세관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붉은색 벽돌과 양철지붕의 조화가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런 느낌을 준다. |
| ⓒ 이병철 |
그 시절 군산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았을 것이다. 군인으로, 경찰로, 은행원으로, 각종 기관 종사자로, 때론 어마어마한 대지주로 그들은 살았다. 조선이, 군산이 그리고 넓은 호남평야가 그들의 땅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었고, 이 땅에서 영속할 으리으리하고 단단한 집을 지었으며, 일본에서 들여온 고급 자재로 절을 짓고 종을 만들어 달았다.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명 '히로쓰 가옥'이고, 일본 조동종 계열의 사찰이었던 동국사다.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갔다.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라 했다. 역시 외관에서 풍겨 나오는 그 모든 것은 '일본식'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건물이다. 얇은 유리창 너머 어둡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내부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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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흥동가옥내부. 유리창 너머로 건네본 일명 '히로쓰가옥'의 내부다. 다다미방이나 넓은 복도 등이 이국적이다. |
| ⓒ 이병철 |
원래 이름은 금강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조계종 절이 된 동국사. 몇 년 전인가 일본 조동종 스님이 찾아와 참회의 마음을 전하고 갔다는 이곳. 그만큼 그 모습이 뚜렷하다. 커다란 금당과 부속 건물이 좁은 통로로 이어진 일본식 사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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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사. 일제시대 금강사라는 이름의 절로 지어진 일본식 사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
| ⓒ 이병철 |
뒤틀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절 마당 한쪽에 생경한 종루가 서 있다. 우리네 범종은 지면에 거의 닿게 걸어서 치지만, 일본의 종은 여기처럼 종각 천장에 매달아 소리를 울린다. 아직 저 종 치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해 우리 범종과 어떻게 다른 지 모르겠다.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것이 우리와 일본이라서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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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사종. 동국사 종루에 걸린 종. 일본의 종은 이처럼 높이 매달아 친다. 종소리가 어떨지 궁금하다. |
| ⓒ 이병철 |
거리를 걸었다. 적당한 저녁 식사 장소를 물색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직진도 해 보고 좌회전, 우회전도 해 본다. 미안하지만 첨단을 가고 있는 도시는 아닌 듯, 여기저기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도 보인다. 외지인에겐 푸근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한편에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인 동네 한 꼭지를 가져다 놓은 듯 일군의 목조 건물군을 만났다.
처음엔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했지만, 안내판에는 '군산 근대역사 체험공간'이라 쓰여 있다. 새로 조성한 곳이다. 안내문 말미에 이렇게 써 두었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좋은 말이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미 사라진 그 시절의 흔적을 이렇게 복원해 놓고 역사 체험 공간이라 해 놓은 이유가 알고 싶었다. 어둠이 깔리는 시내 저편에 기름 냄새 섞인 비릿한 항구의 정취가 코끝에 느껴졌다. 아침에 뵙지 못한 용현리마애불의 미소를 애써 떠올려 본다. 아직은 겨울이 아니라 밤 공기가 견딜 만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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