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프랑켄슈타인'이 주는 실존주의적 메시지
[이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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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켄슈타인 신의 영역을 침범해 창조주가 된 프랑켄슈타인 |
| ⓒ 넷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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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델 토로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을 좀 더 일찍 만들었다면 자신과 아버지의 대화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자신과 아들 사이의 대화라고 말한다.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고통을 어떻게 끊고 이젠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영화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
| ⓒ 넷플릭스 |
빅터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체벌을 받아가며 의학지식을 외워야만 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해 그는 주변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고 든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의 영역에 도전하며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입시키는 연구를 진행한다. 사형수와 죽은 병사들의 신체 부위를 봉합하고 림프계에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불멸의 생명체를 만든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성공해내는 데에만 급급했지 그 이후에 대해서 그 어떠한 계획도 없는 상태였다. 이건 큰 문제가 됐다. 광기와 열정의 결실이 비극을 초래하는 데 결정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 낸 생명체는 지능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언어를 가르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빅터' 이외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빅터는 생명체에게 채찍질을 한다. 여기에는 생명을 준 자와 생명을 받은 자 사이의 기대와 실망, 긴장과 갈등 그리고 고통이 담겨 있다.
성숙하지 못한 빅터에게 흉측한 몰골을 한 생명체는 마치 괴물 같았고 커다란 체구에 상응하는 괴력을 지닌 것은 공포로 다가왔다. 결국 빅터는 자신의 성취가 부자연스럽고 공허하다고 느끼며 연구 시설과 함께 생명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프랑켄슈타인 메이킹 필름인 해부학 수업에서 델 토로 감독은 일반적이지 않은 자식과 그에 실망한 아들 관계에서 비롯된 인간 내면의 균열을 다루고 싶었다고 밝힌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기투됐고 역시나 같은 방식으로 빅터에게 버려진 생명체는 외형 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조각난 채 세상의 냉대 속에 철저히 소외되고 고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사랑과 존중 인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절망과 좌절, 원한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생명체는 숲 속의 오두막집에 몰래 숨어 들어 그들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벽 틈에 난 구멍으로 언어를 터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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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존주의와 프랑켄슈타인 원작을 뛰어 넘어 자신의 스타일로 재창조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 ⓒ 넷플릭스 |
생명체는 숲에서 생활하면서 사냥꾼이 늑대를 미워하지 않고 늑대들은 양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폭력은 피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 어떤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사냥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또한 생김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하고, 그를 위한 자리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동반자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빅터는 이를 거절한다. 심지어 생명체를 없애고자 그에게 다이너마이트까지 안긴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죽음 앞에 선 빅터는 생명체에게 사과하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마음이 내킨다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아버지로서 조언한다. 살아있는 동안 생명체가 세상으로부터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것임을 받아들이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살아가라고 말이다. 비록 세상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곳이고 인생은 그 속에서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며 완벽한 행복이 없음을 경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지를 통해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삶의 본질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빅터는 이를 유언으로 그리고 마지막 유산처럼 생명체에게 남겼고 그러면서 그를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아들'로 부른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아버지가 준 이름이지만 이름 뿐인 아무 의미도 없었던 '실재'이기만 했던 그 이름을 생명체가 불러주면서 의미를 부여해 타자와 관계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된 '실존'이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생명체가 그 이름을 불러줬을 땐 세상에 전부였던 것을 상기하며 빅터는 '실재'에서 '실존'이 되고자 한다. 생명체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용서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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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켄슈타인과 실존주의 실존주의 철학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 <프랑켄슈타인> |
| ⓒ 넷플릭스 |
고통스럽게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끊을 수 없는 불멸의 순환 속에 이뤄지고 있다면 이것은 저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을 부여받은 생명체는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빛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크린엔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이 문구가 마침표처럼 찍힌다. 이는 원작 작가 메리 셀리와 제네바에 있는 별장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던 바이런 경의 말이며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으면서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점 메시지를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배치해 준 것은 델 토로 감독의 선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작품이 그저 공상 과학, 공포물로만 취급되어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완벽한 신화만이 양지에 설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없다. 그런 속에 델 토로 감독은 과감히 우리 인생은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고 그런 불완전함까지 용서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로써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인간됨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빅터가 창조한 생명체를 괴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필자의 의지다. 그가 괴물이 된 건 그의 삶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우연히 받은 삶의 조건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충분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괴물은 오히려 그를 괴물로 부르고 괴물로 대하고 괴물로 만든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명체를 '괴물'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인 빅터가 마침내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는 상호성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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