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을 외면한 소녀와 꽃밭을 가꾸던 소년

유신준 2025. 11. 1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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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행잉바스켓 마스터 시험은 끝났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유신준 기자]

시험은 끝났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시험 결과는 2개월 후 개별 통지될 것이다.

합격하면 폼이야 나겠지만 그건 내맘대로 되는 일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본 행잉바스켓 마스터 시험이라는 과정을 내 힘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점이다. 과정을 통해서 내 지식과 경험치는 이미 향상되었다. 자격증이란 단지 어떤 시점에서 내가 그만큼 알고 있다는 일시적인 증거일 뿐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운좋게 알고 있는 문제들이 많이 나와서 합격했을 수도 있는 거다. 실력 빵빵한 사람이 일진 사나워 쓰라린 고배를 마실 수도 있는 거고. 사람들은 합격, 불합격만 따지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다. 시험 결과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건 아닌 것이다.
 지금 서 있는 이 출구는 곧 또 다른 공간의 입구가 될 것이다.
ⓒ 유신준
애초 이번 시험은 자격취득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헹잉바스켓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도구로 시험을 치는 방법을 택했다. 시험은 내게 공부하는 과정이며 계기였을 뿐이다. 마스터 자격시험은 내 행잉바스켓 공부라는 긴 여정의 출발선이었다.

내게 시험은 등대와 같았다. 목표가 되어 길을 인도해주고, 또 다음 항로를 알려줬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다. 한국에서 조경사 시험이 나를 일본 정원사의 길로 이끌었고, 일본 정원사로 일하면서 행잉바스켓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다음 걸음을 여는 운명의 여정이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나는 귀국하면 이번 시험의 당락과 관계없이 내가 배운 것들을 나누는 일을 시작할 생각이다. 지금 서 있는 이 출구는 곧 또 다른 공간의 입구가 될 것이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B씨와 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리끼리 돌아가겠다고 우겼지만 기무라선생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신오사카 역까지 선생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신칸센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드문드문 비어 었었고 실내는 조용했다. 이윽고 기차가 출발했다. 창 밖으로 일본의 가을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화훼 전문매장 스태프로 일한 지 십년이 넘었다 했다. 어려서부터 꽃을 좋아했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꽃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꽃을 사들이는 걸 보며 자랐다. 쓸데없이 낭비한다며 대놓고 투덜대는 일이 많아졌다. 수많은 날들을 엄마와 돌아 다니면서도 꽃같은 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옛 기억들이 잔잔히 묻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꽃이 좋아진 건 아는 사람 소개로 화훼 매장에 근무하면서 부터였다. 처음에 꽃은 그저 직장 일과였다. 꽃을 좋아하는 손님들의 환한 표정을 보면서 점차 마음이 달라졌다. 나중에는 얼마나 꽃에 빠졌던지, 꽃 공부를 위해 뒤늦게 원예 관련 학교에 다녀볼까 고민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게를 장식하느라 행잉바스켓을 만들었는데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 주위에서 재능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마스터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일이었는데 어느새 꽃이 자기 인생의 중심이 되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시절 인연이라 하던가. 사람에게는 정해진 때가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다니며 보았던 무수한 꽃들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꽃이 새롭게 다가왔다.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이 낮설게 빛나는 개안의 순간이었다.

내 이야기도 들려줬다. 나는 어려서부터 꽃을 좋아했다. 국민학교 때 친구 집에서 얻어다 심었던 다알리아 꽃을 지금도 기억할 정도다. 투박한 알뿌리에서 솟아나오던 가냘픈 새순의 경이.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주러 달려가던 설렘. 등굣길 아침 햇살아래 선명하게 피어나던 그 새빨간 환희까지. 나무 울타리 옆에는 노란 백일홍도 피어 있었다.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내가 가꾸는 작은 꽃밭이었다. "꽃을 좋아하면 연애를 잘 한다는데..."엄마가 걱정하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예언은 빗나갔다. 연애는 감성만 풍부하다고 잘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운좋게 굴러오는 볼은 많았지만 상황 대처 능력이 빵점이었다. 둔한 눈치로 인해 민첩한 순발력을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긴장한 나머지 헛발질만 해 대는 바람에 대부분의 경기를 망쳐 버렸다.
 시험은 끝났지만, 새로운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 유신준
B씨가 흥미로운 듯 한국에서도 계속 정원을 가꾸었냐고 물었다.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직장 생활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다 보면 꽃은 그저 가끔 화분 하나씩 사다 놓는 정도였다. 그러다 다시 나무와 꽃을 가까이 하게 된 건 정원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내가 행잉바스켓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이야기했다. 꽃을 모아 심으면 한 가지만 심었을 때보다 몇 배나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 놀랐다고 말했다. 색의 조화, 형태의 균형,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는 심오한 예술 장르로 보였다고. 그래서 꽃바구니에 홀려 마스터 시험에 발을 들여놓게 됐노라고.

한국에는 아직 행잉 바스켓 화분이 없어서, 일단 일반 화분을 쓰는 요세우에(모아심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녀는 요세우에와 비교할 수 없는 행잉바스켓의 매력을 역설하며 아쉬워 했다. "그건 하늘과 땅의 차이예요." 공간감이 다르고, 빛을 받는 방식도 다르고,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도 다른 거라고. 눈앞에 있으면 그만큼 주목하게 되고 가깝게 느껴지는 거라고 그녀가 설명했다. 결국 행잉바스켓은 모아심기의 꽃이라는 거였다.

창 밖은 어느덧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쳤다. 한 사람은 어머니를 따라 꽃길을 걸으며 외면했고, 한 사람은 혼자 꽃밭을 가꾸다 삶에 쫓겼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같은 시험장에서 만나 귀로에 앉아 있었다. 내가 창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그녀가 바라봤다. 나는 그들을 향해—우리 자신을 향해—말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이야기도 이어졌다. 내가 꽃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B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선다형에서 애를 먹었다고 했다. 내가 이제부터는 꽃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하니,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가게로 놀러오라 했다. 실물을 보면서 배우는 게 책으로 공부하는 것보다 백배 빠르다면서. 마침 남자직원이 그만둬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생각 있으면 점장에게 말해주겠다면서. 급여는 많지 않지만 꽃 공부하기엔 최고의 환경이라 했다.

구미가 당겼다. 일본에서 초화류의 유통경로를 알고 싶었다. 어떤 종류의 꽃들이 계절마다 들어오는지, 가격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 손님들은 어떤 꽃을 선호하는지, 일본의 꽃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현장 지식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같은 시험을 봤다는 경험의 연대감은, 국적과 성별과 취향까지 가볍게 뛰어넘게 했다. 우리 이야기는 신칸센 안에서 두 시간 내내 계속됐고, 그녀 차로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동안에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녀 가게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생각했다. 시험은 끝났지만 새로운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꽃과 함께하며 공부하는 삶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거다. 시험이 내게 등대가 되어 항로를 알려주었듯, 이국의 좋은 인연들이 별자리처럼 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인블로그 일본정원이야기 (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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